[여의도포럼] 종교 정체성은 국가를 넘어서는가
기독교 최전방 국가 아르메니아
튀르키예의 강압적 '인구 교환'
발칸반도 보스니아 인종 학살
종교적 관용 속에 정체성 찾아야
갈등 없이 평화와 번영 누릴 것
국제회의 참석차 방문한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은 밝은 표정의 시민들이 일상을 영위하는 활기찬 도시였다. 아르메니아는 1990년대 소비에트 해체기 때는 말할 것도 없고 2020년부터 지난겨울까지 전면전과 국지적 충돌이 계속됐던 나라다. 분쟁지역을 놓고 지난 수십년 동안 아제르바이잔과 벌인 대결 양상이 여러 차례 전쟁으로 나타났다. 국제회의에 참석해 평화와 안정, 연결과 번영을 강조하는 총리의 발언이 무겁게 다가오는 것은 지금 평화롭게 일상을 누리는 예레반 시민들의 안녕이 이웃 나라들과의 충돌로 깨진 수많은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아는 국민의 97% 이상이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를 믿는 기독교 국가다. 기원후 301년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했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화한 392년보다 91년 빠르고, 기독교를 허용한 313년보다도 12년 앞선 때다. 시라쿠사의 성녀 루치아가 순교한 것이 304년이니, 캅카스에는 모든 신민이 기독교를 자신의 종교로 받아들이는 나라가 있는데 지중해 저편 시칠리아에서는 기독교를 믿는다고 죽임을 당한 것이다.
종교로 지도를 다시 보면, 아르메니아는 북쪽에 같은 기독교를 믿는 러시아와 조지아와 이어진 반면 다른 삼면으로는 무슬림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는 기독교 최전방 국가다. 서쪽으로 국경을 마주한 튀르키예와도 사이가 좋지 않은데, 오스만튀르크가 이 지역을 지배했던 1915년에서 1923년 사이에 아르메니아인들이 강제이주를 당하는 과정에서 많은 고초를 겪은 불행한 과거가 있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아는 서쪽의 튀르키예, 동쪽의 아제르바이잔과 아직도 육상 국경이 열려 있지 않은 내륙국가로 남아 있다.
어려운 지정학적 위치에도 불구하고 현대 아르메니아는 종교적 정체성이 국가 정체성과 일치하는 나라다. 종교로 인한 긴장감은 거의 없다. 반면 지난 세기 아나톨리아 반도와 그 주변에는 아르메니아인들의 강제이주뿐만 아니라 종교 정체성에 따라 국가와 민족 정체성이 강제로 재구성되는 일이 있었고, 이에 따라 불행한 역사가 도처에서 발생했다.
“인구교환의 기준은 단 하나, 종교였습니다. 사용하는 언어나 문화, 국가 정체성, 가족의 역사는 다 무시됐죠.” 지난겨울 튀르키예 서부 해안지방 준다섬에서 만난 아흐메트는 조상이 크레타섬에서 왔다고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추방명령이 떨어졌고 완전한 그리스인이었던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단지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튀르키예로 추방됐다고 했다. 1923년 로잔조약에 따라 그리스와 튀르키예는 ‘인구교환’에 합의했고, 교환이라는 중립적 표현 뒤에서 무자비한 추방이 이뤄졌다. 아흐메트의 선조와 같은 사람들이 50만명. 아나톨리아에서 추방된 정교회 신자는 150만명에 달했다. 수많은 사람이 삶의 터전과 재산, 심지어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종교 정체성에 따라 국가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작업은 엄청난 희생이 따랐다. 아르메니아인들을 시리아로 추방한 오스만튀르크는 정교를 믿는 그리스계도 추방함으로써 무슬림으로 통일된 아나톨리아 종교 지도를 완성했다. 인구교환을 계기로 현대 그리스도 기나긴 오스만튀르크 지배 역사의 결과물이었던 다양한 종교지도를 단순화했다.
종교지도를 단순화하고 국가를 단일한 종교 정체성으로 통일시키는 작업에 실패한 대표적인 곳이 발칸이다. 지금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남부와 남서부의 크로아티아계 가톨릭교도, 중부에 흩어진 보스니아 무슬림, 그리고 북동부 및 남동부에 걸쳐 있는 정교를 믿는 세르비아계가 긴장 속에 대치하고 있다. 지난여름 모스타르의 박물관에서 본 보스니아 내전 당시 무슬림 학살은 과도한 종교 정체성이 발현된 최악의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 정체성에 따라 국민을 재구성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인가. 발칸과 아나톨리아, 캅카스의 사례는 문제 해결의 일면을 가장 비극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종교적 관용을 유지하고 종교적 다양성을 중시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다층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종교나 민족과 이념을 내세워서 국민을 선동하는 정치지도자를 구별해 낼 수 있는 국민이라면 인종청소나 강제이주 없이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김흥종 고려대 국제대학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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