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폭염 심각한데 45년 전에 멈춘 실내온도 기준
얼마 전에 직원 몇 명이 “사무실이 너무 더워 도저히 일할 수 없다”며 항의하러 노조위원장인 나를 찾아왔다. 노조 사무실은 좀 시원할 것이라 생각했나 보다. 그런데 선풍기와 부채로 연신 땀을 식히는 노조위원장을 보더니 멋쩍게 웃었다. 처지가 같으니 항의는 곧 하소연으로 바뀌었고, 자연스레 대화 주제가 공공기관 근로자의 열악한 근무 환경으로 바뀌었다. 위로하며 돌려보내고 나니 직원들의 고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미안함으로 사무실 더위가 오히려 한기로 느껴졌다.
지난 10일 서울엔 사상 처음 ‘9월 폭염 경보’가 발효됐다. 사상 최장 열대야 기록을 세운 올여름은 유난히 무더웠다. 저녁 연장근무를 해야 하는 직원에게 최악의 여름이었다. 중앙냉방의 경우 근무시간 이후에 더운 바람 나오는 선풍기로 버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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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공기관의 에너지 규정 불합리
매년 찜통 더위, 냉장고 추위 반복
제도 개선해 우수 인력 이탈 막자
」
제한적으로 에어컨 바람을 쐴 수 있는 일과시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창가 자리는 햇볕에 달궈진 열기로, 안쪽 자리는 칸막이 때문에 시원한 기운이 닿지 않아 실내 온도가 30도에 육박한다. 대부분 공공기관에서 일상이 된 지 오래다. 개별냉방이라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에어컨을 세게 틀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공공기관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첫째 이유는 공공기관의 에너지 이용 합리화 규정 때문이다. 어린이집과 노인복지시설 등을 제외한 대부분 공공기관의 실내 온도를 여름철에는 평균 28도 이상, 겨울철에는 평균 18도 이하로 유지해야 한다. 이 기준은 1980년에 정해진 것인데, 당시 서울의 8월 평균 기온이 23.1도였다. 올해는 27.9도로 4.8도나 상승했다.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폭염일수가 하루도 안 됐지만, 올해는 27일로 역대 최다였다. 이처럼 기온은 많이 올랐지만, 실내 온도 기준은 45년 전 그대로다. 올해 한시적으로 26도로 설정하라는 정부의 공문이 있었으나 미봉책이다. 현실을 반영한 새로운 기준이 시급하다.
둘째, 공공기관 경영실적 평가에 이유가 있다. 정부는 매년 공공기관의 경영 실적을 평가하고 그 결과에 따라 성과급을 차등 지급한다. 평가 항목 중 ‘에너지 사용량 절감 실적’에서 만점을 받으려면 전기·도시가스 등 에너지원별 사용량은 3년간 평균 대비 10% 이상을 절감해야 한다.
예컨대 재작년·작년·올해의 평균 사용량이 100이었다면 작년·올해·내년도 사용량의 평균은 90이어야 한다. 이듬해에는 전년 대비 10%를 절감해야 하니 9를 더 줄여 81만큼만 써야 한다. 이렇게 줄이다 보면 10년 후에는 올해 에너지 사용량의 절반 정도만 써야 한다. 비현실적인 목표다. 전력 사용량을 줄이기 위해 공공기관 직원들의 솔선수범이 요구된다고는 하지만 자발적인 동참이 아니라 실현 불가능한 목표에 따른 결과로 공공기관을 줄 세우는 방식은 분명 문제다. 이 지표는 폐지해야 한다.
9월 들어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해졌다지만, 낮에는 여전히 30도를 웃돈다. 어쨌든 겨울이 되면 공공기관 근로자들은 추위를 걱정해야 한다. 아침저녁으로 입김이 나오는 사무실에서 히터 대신 솜바지와 털양말을 착용하고, 끝부분이 뚫린 장갑을 끼고 손을 호호 불며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야 한다. 이런 사무실 풍경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의식주만큼 중요한 인간의 기본적인 환경도 충족되지 못한 채 사무실에서 추위와 더위를 걱정해야 하는 공공기관 근로자는 분명 ‘에너지 취약계층’이다.
정부가 공무원 등 공공 분야에서 인력 이탈 현상에 많은 대책을 내놓고 있다. 민간보다 낮은 연봉은 물론이고 복지 혜택 등에서 소외된 공공부문 근로자들이 왜 떠나는지 따져 근본적 대책을 제시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들을 에너지 취약계층에서 해방시켜 주는 데서 출발하면 어떨까.
공기업 등 공공기관에 대한 국민의 불편한 시선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공공부문 근로자들이 원하는 것은 과도한 냉난방 혜택이 아니다. 그저 여름철 찜통더위와 겨울철 냉장고 추위를 면할 수 있을 정도의 실내 근무 환경이면 족하다. 이는 국민 정서에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열악한 근무 환경 개선으로 공공기관 근로자들이 행복해야 그 서비스를 받는 국민도 함께 행복하지 않겠나.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변정섭 한국관광공사 노동조합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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