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엘리트 정치의 위기
국경으로 갈라져 있어도 여러 나라의 유사한 지류가 합쳐 세계사의 한 물줄기를 만들어나간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 물줄기에 대한 가치 판단을 떠나, 인간의 정서와 사고방식은 어디서나 비슷해서 일어나는 현상일 것이다.
이런 흐름은 대형 언론을 통해서는 잘 드러나지 않을 때가 있다. 미국의 경우 뉴욕타임스, CNN 등 주류 언론은 민주당 텃밭이던 미국 남부와 러스트 벨트의 공업 지대가 지난 10년간 공화당 지지세로 넘어가던 변화를 놓쳤다. “도널드 트럼프는 이상하다”는 기사가 흘러넘치는 와중에 그런 ‘이상한 트럼프’를 지지하는 세력 역시 하나의 큰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미국에서 이런 흐름은 대도시 엘리트에 비해 소외됐다고 느끼는 노동자와 서민층이 주도하고 있다. 이민자와 난민으로 일자리를 잃었다는 박탈감, 정치 엘리트가 고상한 가치만 늘어놓고 문제 해결은 못 한다는 분노가 그들의 원동력이다.
미국뿐만 아니다. 이달 초 치러진 독일의 지방선거 두 개를 두고 “극우 독일대안당(Afd) 약진”, “극좌 ‘자라바겐크네히트동맹’(BSW) 돌풍”이라는 외신이 쏟아졌다. 두 정당 지지율을 합치면 유권자의 절반에 육박한다.
겉으로 보면 독일 사회가 극우와 극좌로 쪼개진 듯하지만 두 정당은 공통 요소가 적지 않다. 둘 다 “이민자와 난민에 들어갈 돈을 독일 빈곤층에 쓰자”고 하고, 인종과 성별의 ‘정체성 정치’ 같은 도시 엘리트 취향의 의제에 부정적이다. 흥미로운 건 두 정당 모두 우크라이나 지원에 반대한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미국 공화당과 대외정책에 공명하고 있다. 얼마 전 총선을 끝낸 프랑스와 영국의 사정도 비슷하다.
미국과 유럽에서 부는 이 바람을 혹자는 반지성주의라고 한다. 위험한 인종주의나 민족주의가 이들의 원동력 중 하나라는 건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대도시·화이트칼라·고학력 정치 엘리트가 이끄는 기성 정당에 대한 실망감이 이 흐름의 공통된 성장 토양이라는 점도 잊어선 안 된다. 정치가 일자리와 치안 같은 기본을 놓치면 언제든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정치 흐름에서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닐 수 있다. 기성 정치권에 대한 허탈감이 어떤 식으로든 표출될 소지가 잠재해 있다. 우리 정치 엘리트들은 그에 대한 대비는 돼 있을까. 그 어렵다는 시험을 통과한 검사 출신 대통령과 여당 대표의 지지율이 바닥을 기고 있다는 여론조사를 보면서, 우리 정치인들도 중요한 걸 소홀히 하지는 않은지 우려의 마음이 든다.
박현준 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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