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머니즘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살면서 딱 한 번 사주를 본 적이 있었다. 20대 후반, 친구와 홍대 앞을 지나다 “지금 당신의 인연을 지나치지 마세요”라는 문장을 보고 홀린 듯 가게로 들어간 것이다. 태어난 날과 시간을 알려주고 두근대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역술인이 호통을 치며 말했다. “결혼하지 못할 운명이야. 한다 해도 아주 늦은 때일 것이고, 그마저도 갈라설 팔자.” 브레이크 없이 돌진한 팔자 풀이에 나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야… 페미니스트 사주가 따로 있나 봐.” 그 후로 20분간 역술인은 내가 결혼하기 위해 고쳐야 할 마음가짐과, 번번이 짧게 끝나는 친구의 연애 방식에 대해 충고했다. 가게를 나와 한동안 조용히 걷던 친구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야! 연애운이란 거 그냥 생김새 보고 거기에 맞춰서 추측하는 거 아니야? 참 나, 자기는 그럼 얼마나 대단한 연애를 하길래?”
내 친구처럼 ‘연애운’을 보다가 분한 마음을 가져본 사람들이라면 〈신들린 연애〉(SBS)와 같은 프로그램을 벼르지 않았을까? 지난달 종영한 〈신들린 연애〉는 신점, 사주, 타로 등 서로 다른 영역의 점술가 8인이 합숙을 하며 그 안에서 각자의 짝을 찾는 연애 리얼리티다. 누구보다 정해진 운명을 믿는 무당, 타로마스터, 역술인은 첫 등장부터 상대 출연자의 생년월일을 보고 운명의 짝을 택한다. 내 사주와 만났을 때 가장 길한 기운을 가진 사람, 내 의지가 아니라 내가 섬기는 신령님이 선택한 사람, 카드가 강력하게 나의 짝이라고 신호를 보내는 사람…. 제3의 힘이 있기 때문일까? 〈신들린 연애〉는 세속적인 기준으로 서로를 탐색하느라 진도가 늦어지는 다른 연애 프로그램 출연자들과는 달리 초반부터 자신들의 운명에 순응해 적극적으로 상대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랜덤 데이트를 하고, 함께 생활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출연자들의 선택에는 변화가 생긴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사주와 다르게 진행되는 상황에 혼란을 겪던 한 남성 역술가는 결국 자진 퇴소를 하고, 남은 점술가들 역시 모두 자신이 사전에 정한 상대가 아닌, 함께 지내며 자신의 마음을 움직인 상대, 심지어 자신과 상극이라 점쳤었던 상대를 최종 선택한다. 출연자들은 “신령님 뜻을 떠나 인간의 마음으로 선택할 거다”, “우리는 신이 아니니까. 우리는 인간이니까” 같은 말을 주고받으며 자신들의 직업과 엉켜 있는 감정의 문제들을 차분히 풀어내고, 운명을 이겨내는 인간의 힘을 긍정한다.
감동적이라 생각했지만 찜찜하기도 했다. 무속이나 미신에 대해 별다른 의심을 갖지 않도록 설계된 연출 때문이었다. 〈신들린 연애〉의 출연자들은 ‘퇴마’를 위해 무시무시한 검을 차고 다니고, 오방기와 엽전으로 관계를 점검하며, 타로 카드를 섞어 자신의 문제를 점검한다. 결코 일반적이지 않은 모습이지만 스튜디오에서 코멘트를 더하는 패널들은 그런 그들의 모습에 이입해 로맨틱한 표정을 짓고, 그들의 연애에서 ‘카운슬링’에 가까운 직업병을 읽어내기만 한다. 연출자도, 출연자도, 패널도 “에이, ‘신령님’이 어디 있어요”라는 말 따위는 하지 않으니 보는 사람도 ‘그러려니’ 하며 시청하게 된다. 〈신들린 연애〉의 이러한 방송 문법은 운세, 사주 등을 깊이 파고들지 않고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는 데 사용하는 젊은 세대의 관점에서 기인한 듯 보인다. 가장 오래된 직업이지만 늘 부정적인 존재로 취급되던 점술가들의 삶에 편견 없이 접근하는 이런 태도는, 출연자들이 점술가라는 직업을 선택하게 된 과정과 그 과정에서 스스로 자신들의 삶을 의심했던 시간들과 만나며 무속 신앙에 대한 경계를 낮추고, 나아가 미신, 종교, 과학 등 인간이 불안을 겪으며 가지는 믿음의 범주에 대해 질문하기도 한다.
실제 무당들이 등장해 ‘신병’을 앓거나 귀신 들린 사례자를 치료해주는 이야기를 담은 〈샤먼: 귀신전〉(tving) 역시 〈신들린 연애〉처럼 무속에 대한 불신과 맹목적인 믿음, 상반되는 2가지 태도를 질문으로 풀어내는 다큐멘터리다. 〈샤먼: 귀신전〉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고통받거나 불가해한 사건을 겪은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또는 증상)을 고백하면, 이를 들은 무당이 무속의 언어로 그것을 해설하고, 굿이나 기도로 사례자의 문제를 해결하는 구성을 띠고 있다. 내 몸이 내 몸처럼 느껴지지 않고, 자꾸만 짜증이 나고 폭력적으로 변한다는 한 의뢰인은 ‘지박령’이 아닐까 하는 추측으로 이사를 감행하지만, 새집을 둘러본 무당은 문제는 집이 아니라고 답을 한다. 무당은 의뢰인과 그의 연인을 앉혀두고 그들의 일가친척, 가까운 친구들에게 있었던 흉흉한 일들을 심문하듯 묻는다. 미리 각본이라도 짜놓은 듯 두 사람은 무당의 추측에 “맞다”고 답하며 놀라움을 감추지 않고, 결국 자신들의 몸에 씐 귀신을 내쫓는 풀이 의식에 참여하게 된다. 짜증 내는 여자, 그리고 그의 짜증을 다 받아주며 살던 남자. 과연 이들의 관계가 와해됐던 것은 정말 서로의 몸에 귀신이 붙었기 때문일까? 〈샤먼: 귀신전〉은 배우 옥자연·유지태를 진행자이자 관찰자로 이용해 이러한 의문들을 일상적인 문제 해결 방식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유 없이 짜증을 내고, 사람을 만나는 것을 거부했던 여성과, 그 여성을 수발하며 생활했다는 남성은 ‘부정풀이’, ‘고풀이’ 같은 의식을 치르며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너(무당)만 없으면 난 계속 이 몸에 붙어 살 수 있어”처럼 자신 안의 다른 인격이 말하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몸을 떨고, 눈물을 흘린다. 사례자는 무당과 연극을 하듯 대화를 주고받으며 말하지 못했던 속마음을 드러내고, 무당은 사례자의 편을 들어주듯 “그것은 네가 한 짓이 아니”라며 귀문을 닫는다. 모든 의식이 끝나자 유지태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등장한다. “정말 몸속에 귀신이 들어와 말을 한 건가요?” 사례자는 그렇다고 대답하지만 그 진위와 관계없이 이 굿판은 이미 이들이 감추고 있던 문제들을 수면 위로 올려 관계 회복의 실마리를 만들었다. 이처럼 〈샤먼: 귀신전〉은 드라마 〈악귀〉, 영화 〈파묘〉 등으로 입증된 무속과 미신에 대한 오락적 가치를 극대화한 뒤, 실제 무속 연구자와 무당들의 구체적인 증언을 통해 무속에 서린 공포의 이미지를 걷어내고, 치유와 해소라는 전통적인 무속의 역할을 지금 현재, 우리의 관계에 적용한다.
한국 고전 서사 속 귀신의 의미를 다룬 책 〈귀신과 트라우마〉에서 윤혜신 작가는 “귀신 이야기는 드라마, 소설, 만화 속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인간에게 트라우마가 있는 한, 그리고 그 치유법을 모르는 한, 귀신 서사와 담론은 계속 만들어질 것”이라 말한다. 귀신은 인간의 무의식과 상상력 사이에 존재하고, 따라서 인간의 호기심을 충족하고자 하는 미디어는 그 미지의 장면들을 적극적으로 창작해 인간에게 내재된 불안을 끝없이 생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속인들을 공포스러운 장면에서 분리해, ‘우리 편’으로 만들거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존재로 대우하는 일련의 콘텐츠는 지금 우리 사회가 겪는 높은 불안이 더 이상 오락거리로 받아들여질 수만은 없음을 뜻하는 듯하다. 불안과 믿음의 측면에서 미신은 종교, 과학과 같은 범주에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저마다 각자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무언가를 믿고, 그것에 의존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무속 콘텐츠의 유행에 부쳐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불안은 어디서 오는지, 혹시 어딘가에서부터 조장된 것은 아닌지. 또한 무언가를 믿는다는 행위가 그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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