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세 이순재가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기다리는가
[안지훈 기자]
▲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공연사진 |
ⓒ (주)파크컴퍼니 |
그들은 고도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고도를 기다리는 이유조차 설명하지 못한다. 모호하고 추상적이며, 작품 속엔 물음표가 가득하다. 그런 <고도를 기다리며>를 오마주한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가 관객을 9월부터 관객을 만나기 시작했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요!"
무대는 배우들의 대기실로 설정돼 있다. 한쪽에서 실제 공연 중인 <고도를 기다리며>의 오디오가 들려온다. 대기실엔 주연 배우가 무대에 오르지 못할 상황을 대비해 대기하고 있는 '언더스터디' 두 명이 있다. 에스트라공의 언더스터디 '에스터', 블라디미르의 언더스터디 '밸'.
69년의 연기 경력을 가진 국내 최고령 배우 이순재가 '에스터'를 연기하고, 곽동연이 같은 배역을 번갈아 맡아 새로운 매력을 선보인다. '샤이니'로 활동해온 최민호가 '밸' 역을 맡아 연극 무대에 데뷔하고, 같은 배역에 카이와 박정복이 함께 한다. 여기에 정재원, 박수연이 무대 조감독 '로라' 역을 맡는다. 공연은 12월 1일까지 예스24스테이지 3관에서 이어진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들
대역 배우인 에스터와 밸은 <고도를 기다리며> 무대에 오를 날을 기다린다. 에스터는 10년도 넘는 시간 동안 에스트라공을 연기하는 날을 기다려왔다. 이들은 언젠가 연출가가 찾아와 자신들에게 무대에 오르라는 사인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정작 연출의 얼굴도, 성별도 모른다.
정체를 알지 못하지만 꿋꿋하게 기다리는 연출가에게서 원작의 '고도'가 오버랩된다. 에스터와 밸이 연기하고 싶은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도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정체를 모르는 고도를 꿋꿋하게 기다리기 때문이다.
▲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공연사진 |
ⓒ (주)파크컴퍼니 |
연극에는 하염없이 무언가를 기다리는 인물이 한 명 더 등장한다. 바로 '메리 이모'다. 무대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밸의 대사를 통해서만 등장한다. 대사에 따르면 메리 이모는 밸이 언젠가 무대에 오를 것을 기대하며 매일같이 극장을 찾아온다.
이들이 기다렸던 그 순간은 언젠가 찾아온다. 하지만 예상했던 상황은 아니다. 에스터와 밸은 조명이 떨어지거나, 공연 도중 배우가 잘리는 등의 이유라면 자신들이 무대에 설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에스터와 밸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이유로 공연은 중단되고, 이들에게 연기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메리 이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메리 이모가 그토록 고대하던 밸의 공연이 펼쳐지게 되었지만, 그 상황은 메리 이모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여타 이유로 메리 이모는 밸의 공연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들이 기다린 무언가는 예상했던 이유건 그렇지 않건 찾아왔다는 것이다.
기다리는 사람의 태도
에스터와 밸은 연극을 지켜보는 관객과 전혀 다른 인물이 아니다. 에스터, 밸과 마찬가지로 관객들 역시 자신만의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이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 메리 이모의 존재가 큰 몫을 했다고 본다.
원작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고도를 기다리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이야기가 지나치게 추상적인 탓에 관객이 자신의 처지를 대입해볼 여유가 부족하다. 반면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는 보다 직관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면서 관객에게 생각할 여유를 제공한다. 여기에 또 다른 무언가를 기다리는 메리 이모라는 존재를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차리도록 한다.
▲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공연사진 |
ⓒ (주)파크컴퍼니 |
원칙을 중시하는 모습은 후반부 공연이 중단됐을 때에도 발현된다. 불의의 사고로 공연은 중단되고, 관객들은 모두 퇴장하고 있다. 오늘 공연이 끝났다고 알리는 무대조감독에게 에스터는 "공연은 계속돼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한다. 관객은 퇴장하고 무대는 공연을 이어나갈 수 없는 상황이지만, 에스터는 원칙을 지킨다.
그렇게 대역 배우의 대기실에서 공연은 이어진다. 에스터와 밸이 연기하는 <고도를 기다리며>. 여기서 이순재가 연기하는 에스터는 공연이 재개되자마자 고개를 떨군다. 무대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이때 필자의 머릿속에 하나의 이야기가 스쳐 지나갔다. 어디선가 배우의 꿈은 무대에서 죽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말에 비추어보면 에스터는 다른 모든 배우들의 꿈을 이룬 것이다. 자신이 그토록 기다리던 <고도를 기다리며>의 첫 무대에서.
규칙을 어기고 로비 화장실을 사용한 밸에게서도 일련의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밸은 어느 때나 자유분방하고, 호기심에 가득 찬 모습을 보인다. 규칙을 어긴 것은 밸의 자유분방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다. 규칙을 어긴 밸은 화장실에서 연예기획사 대표를 만나 자신의 소속사를 구한다.
밸은 기다려야 한다는 대원칙을 어기진 않았다. 그 원칙 아래에서 에스터의 가르침을 받으며 진정한 연기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 와중에 어떤 사소한 규칙 하나를 어겼을 뿐이다. 그리고 밸은 소속사를 얻는 행운을 누린다. 커다란 원칙은 지키되 사소한 금기를 깨야 한다는 일련의 메시지를, 밸이 관객에게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공연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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