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야에 맞이하는 한가위 보름달

유정렬 2024. 9. 17.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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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렬 기자]

 추석 명절에도 폭염은 계속 되고 있다.
ⓒ MBC유튜브 뉴스 갈무리
"추석이 아니고 하석이네."

본격적인 추석 연휴가 시작된 지난 금요일. 폭염의 기세가 꺾이지 않을 거라는 일기예보를 듣자마자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신기하게도 15일 MBC 뉴스 유튜브 영상 썸네일에 같은 문장이 쓰여 있었다. 기이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지리한 무더위는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모처럼 긴 명절 연휴를 맞이해 아내와 아웃렛에 갔다. 가을에 입을 만한 긴 바지가 필요해서다. 겨울까지 무난하게 입을 수 있는 적당한 두께와 핏의 면바지를 사려고 간 것이다.

원래 나의 주력 바지는 청바지였다. 다니던 직장이 자율복장이었는데 청바지를 마치 교복마냥 입고 다녔다. 진한 청, 옅은 청, 찢어진 청 등 나름 디테일의 차별을 두긴 했다. 물론, 내 눈에만 보이는 차이일 뿐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매번 청바지만 입고 다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 입어온 터라, 내 몸에 딱 맞게 잘 적응된 바지들이다. 적당히 에이징 된 바지는 너무 편해서 늘 손이 갔다. 하지만 몇 년을 비슷한 옷만 입다 보니 질리는 감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두루두루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연한 베이지 색의 면바지 하나 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요즘 치노 팬츠가 남성 패션에 있어서는 필수템처럼 된 터라 다양한 면바지들이 출시되고 있다. 가격대 별로 다양하게 각종 브랜드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괜찮은 바지를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구하려면 아웃렛만 한 곳이 없다. 더불어 더위도 피할 수 있으니 1석 2조다.

서울 근교에 있는 아웃렛에 도착했다. 몇 군데 매장을 둘러보는데 의아한 생각이 든다. 당연히 FW시즌 옷들로 가득할 줄 알았는데 진열된 옷의 절반 이상이 여전히 여름옷이었다. 아웃렛은 원래 이월 상품이 주로 판매되기는 하지만, 9월 중순까지 여름옷을 주력으로 판매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분명 긴 면바지가 필요해서 갔는데 어느새 긴바지는 거들떠도 보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반바지와 반팔티 같은 여름옷이 걸려있는 행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매장 안이 무척 시원했지만, 건물과 건물 사이를 오갈 때 잠시 맞이하는 바깥의 무더운 공기는 아직 여름이 한창이라고 속삭이고 있는 것 같았다.

땀이 줄줄 흐르는 한여름 복장의 추석

날짜로 볼 때 여름의 더위는 벌써 두세 풀 정도는 꺾였어야 정상이다. 어릴 때 추석에는 위아래 모두 긴 옷을 입었던 것 같은데 올해는 반팔과 반바지가 더 어울린다. 9월 중순에 맞이하는 민족 최대의 명절인 한가위임에도 땀이 줄줄 흐른다. 한여름의 복장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기왕이면 새 바지를 명절 때 입어야지 하는 욕심도 있었기에 연휴가 시작되자마자 서둘러 아웃렛에 간 것이었다. 아직까지는 덥지만 추석이 오면 선선해지겠지 굴뚝같이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일기예보에서는 추석 연휴에도 더위는 그치지 않을 거란다. 긴 바지 구매 욕구를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긴 바지든 긴 셔츠든 보기만 해도 덥다. 생각해 보니 올여름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후로 나는 내 다리를 한 번도 감춘 적이 없었다. 올여름은 퇴사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여름인데 직장에 다닐 때는 입지 못했던 반바지를 실컷 입었다. 아니, 입을 수밖에 없었다. 역대급으로 무더운 여름날에 반바지는 나에게 패션템이 아닌 생존템이었다.

가을의 등장은 생략하고 곧바로 겨울이 들이닥칠 거라는 불길한 예감마저 든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 긴바지는 무리다. 차라리 조금 더 나중에 도톰한 겨울 바지를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은 명절에 차례를 지내지 않고 가족끼리 모여 간단하게 식사하는 것이 전부라서 딱히 옷을 갖춰 입어야 하는 부담이 없으니 추석에도 쭉 반바지로 입을 듯하다. 최소한의 매너는 지켜야 하니 가지고 있는 반바지 중 그나마 제일 얌전한 것으로 골라본다.

누군가 말했다. 올여름이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될 거라고. 지금의 추세대로라면 매년 여름은 조금씩 더 뜨겁게 그리고 더 오래 우리 곁에 머물게 될 것이다. 9월까지는 완연한 여름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추석 연휴 내내 서울은 물론 전국 대부분 지역에서 열대야가 나타난다고 예보되어 있다. 역시 가을 추(秋) 대신 여름 하(夏)를 쓰는 것이 더 어울린다. 가을 분위기 가득해야 할 추석 날씨가 이래도 되나 싶지만 이제는 전통이 바뀔 때가 되었다. 송편 대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인절미 올린 차가운 팥빙수를 먹는 게 나을 것 같다.

점점 아열대 기후로 변해가는 현실이 예사롭지 않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추석을 앞두고 일기예보에 귀를 기울였던 이유는 오직 달을 보기 위해서였다. 둥글게 꽉 찬 밝은 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빌어야 했으니까. 구름이 끼거나 비가 와서 추석 보름달을 보지 못 하게 되면 괜히 서운했다.

이번 추석에는 구름 사이로 보름달을 볼 수 있을 듯하다. 열대야에 맞이하는 한가위 보름달은 반갑기도 어색하기도 할 것 같다. 그럼에도 여전히 밝게 빛나는 한가위 달을 보게 된다면 오랜만에 소원을 빌려고 한다. 더위는 올해로 충분했으니 내년에는 다시 시원한 밤바람 맞으며 보름달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 얼룩소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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