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겨울, 날씨보다 주머니 사정에 더 춥다
체감 물가·가계 부채가 정책 발목 잡아
불황형 인플레, 경제 근간 흔들 수도
재정 당국, 대안 없이 원론적 답변만
팍팍한 살림은 한가위가 지나도 쉬이 나아지지 않을 듯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추석 명절 인사를 통해 “국민 여러분께서 함께 뛰어주신 덕분에 밝고 희망찬 내일이 열리고 있다. 대한민국의 더 큰 도약과 풍요롭고 행복한 민생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하겠다”고 했지만 현실 경제는 아직 ‘희망찬 내일’이 보이지 않는다.
수출과 물가 상황은 나쁘지 않다. 4분기에도 악화할 가능성이 작다. 다만 기대에는 미치지 못한다.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2023년 연간 수출입 동향에 따르면 지난해 수출은 6326억9000만 달러로 전년 대비 7.4% 줄었다. 애초 정부는 6850억 달러 수출액을 목표로 제시했다. 500억 달러 이상 차이가 난다.
주력 품목인 반도체 수출이 줄어든 게 큰 영향을 미쳤다. 반도체 수출은 전년대비 23% 감소했다. 석유화학 제품도 중국 수출이 15% 정도 줄었다. 무역수지는 99억7000만 달러 적자다. 2022년에 이어 2년 연속 적자다.
희소식이라면 무역수지 적자 폭이 줄었다는 점과 2020년 10월부터 지난해 9월까지 감소했던 수출액이 10월 이후 증가세로 돌아섰다는 점이다. 지난해 10월부터 지난 8월까지 11개월 연속 플러스 흐름이다.
물가도 비교적 안정적이다.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41개월 만에 가장 낮은 2.0%를 기록했다. 4월 이후 전년동월대비 2%대 물가상승률을 이어가고 있다. 농산물 및 석유류 제외 지수(근원물가)는 3년 만에 1%대 상승 폭을 보이기도 했다.
대신 체감 물가는 여전히 높다. 데이터 컨설팅 기업 (주)피앰아이가 최근 전국 만 20~69세 남녀 3000명을 대상으로 체감 물가를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84.9%가 작년보다 올랐다고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35.8%는 ‘꽤 많이 올랐다’고 응답, 30.6%는 ‘매우 많이 올랐다’라고 답했다. 18.5%는 ‘조금 올랐다’라고 답변했다.
높은 체감 물가·에너지 요금 상승 줄이어
겨울철 에너지 요금 상승도 불가피하다. 그동안 요금 인상을 자제하던 에너지 공기업들이 3분기부터 본격적인 가격 인상에 나섰다. 한국지역난방공사는 7월 지역난방 요금을 9.53% 올렸다. 한국가스공사는 지난달 도시가스 주택용 도매 요금을 6.8% 인상했다.
높은 체감 물가에 고금리라는 현실까지 더해지면서 내수는 꽉 막힌 형국이다. 정부는 5개월째 “내수 회복 조짐이 보인다”는 말만 반복 중이다. ‘조짐’이 현실이 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15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2분기(4~6월)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마이너스(-) 0.2%를 기록했다. 2023년 1분기부터 이어온 분기별 플러스(+) 성장률이 깨졌다. 내수 침체 영향이 크다. 민간소비 기여도는 0.3%p에서 –0.1%p로 떨어졌다. 건설투자도 0.5%p에서 -0.3%p로 낮아졌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2분기 물가를 반영한 가계 실질흑자액은 1.7% 줄어든 월평균 100만9000원을 기록했다. 8개 분기 연속 감소다. 2006년 1인 가구를 포함해 가계동향이 공표된 이래 역대 최장기간 줄었다.
지난달 취업자 수는 전년동월대비 12만 3000명 증가했다. 증가 폭은 7월보다 5만명가량 감소했다. 지난 2월까지 취업자 수 증가 폭은 30만명 선이었던 것을 고려할 때 둔화 양상이 두드러진다.
일각에서는 ‘소득감소→불황형소비→내수부진→투자위축→고용악화→소득감소’로 이어지는 불황형 인플레이션을 걱정한다. 이 경우 피라미드 형태의 한국 경제 근본 체제가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돈 쓰고 싶어도 쓸 돈 없는 정부
기획재정부 등은 내수진작 대책으로 금리 인하를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행은 가계 부채 때문에 금리 인하를 쉽게 결정하지 않고 있다. 참고로 올해 2분기 가계빚은 3000조원을 넘었다.
최근 국제결제은행(BIS)은 정례 보고서를 통해 “한국의 경우 국내총생산(GDP) 대비 민간신용 비율이 100% 선을 웃돌면서 경제성장률도 정점을 찍었다”며 가계 부채가 우리 경제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내수 회복의 남은 방법은 재정 당국이 직접 돈을 푸는 것이다. 그런데 쓸 돈이 없다. 올해 예산은 상반기 조기 집행에 집중 투입했다. 지난해 기대했던 것보다 세금까지 적게 걷히면서 나라 살림 자체가 빚에 쪼들린다. 연말께 30조원 이상 세수가 구멍 날 가능성이 크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9일 발표한 ‘경제동향 9월호’를 통해 “우리 경제는 높은 수출 증가세에도 불구하고 고금리 기조로 내수 회복이 지연되는 모습”이라며 “건설투자 선행지표의 누적된 부진을 감안하면 당분간 건설투자 및 관련 고용(건설업)도 부진을 지속하며 내수 회복을 제약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은이 금리를 낮춰도 큰 폭의 인하가 어렵고, 가계부채와 집값 상승에 따른 통화정책 운용도 불확실하다”며 “이자 부담과 세금 등에 소비 여력이 줄며 내수 부진은 갈수록 심화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27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 “내수진작을 위해 기업과 민간의 경제 활동을 촉진해야 한다”면서 규제 완화를 주장했다. 정부 재정 투입에 관해서는 “확장 재정은 부채의 역주행 현상을 일으켜 빚만 늘어나게 된다”고 선을 그었다.
최 부총리는 “주택담보대출에 대한 추가적인 건전성 강화 조치를 추진하는 등 가계대출과 시중 유동성 전반에 대한 모니터링 및 관리를 강화하겠다”는 원론적 답변을 되풀이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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