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는 정말 섹시해"…텍스트힙에 빠졌다, 젠지들의 '책멍'

이보람 2024. 9. 16.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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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저녁 서울 청계천 일대에서 '책읽는 맑은냇가' 행사의 일환으로 열린 '사일런트 야한책멍' 프로그램에서 참가자들이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있다. 연합뉴스

자극적 쾌락 추구, 도파민 중독 세대로 알려진 ‘젠지(GenZ·1990년대 중반 이후 태어난 젊은 세대)’들이 ‘독파민’에 빠졌다. 독파민은 독서와 도파민을 합친 신조어다. 스마트폰을 끄는 대신 과거 아날로그적 활동의 대명사인 독서를 통해 즐거움을 찾는 행위를 뜻한다.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의 A 공간. 간판도 없는 건물 입구로 들어서 가파른 계단을 오른 뒤 예약 때 미리 안내받은 비밀번호를 입력하면 덕수궁 돌담길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공간이 나타난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깔리는 이곳은 낮엔 예약제 공유 서재로, 밤엔 와인을 마시며 책을 볼 수 있는 공간으로 운영된다. 6개 테이블에 앉은 손님들은 모두 20~30대로 보이는 젊은 여성들이었다.

낮 시간대에 방문하면 일행이 있어도 말 한마디 나눌 수 없는 게 이곳의 규칙이지만, 독파민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주말엔 일찌감치 예약이 마감되기 일쑤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3년 차 직장인 박모(29)씨도 약속이 없는 주말이면 종종 이곳을 찾는다. 한 달에 1~2번 정도다. 박씨는 “긴 연휴에 별다른 계획이 없어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며 “명절 단골손님인 친척들의 잔소리를 피해 조용한 공간에서 진정한 휴식을 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Z세대들이 추구하는 독파민의 특징은 단순히 조용한 곳에서 홀로 책을 읽는 기존의 독서 방식에서 나아가 책을 읽는 공간에 초점을 둔다는 점이다. 소셜미디어(SNS)에선 서울 도심을 조망할 수 있는 종로구 인왕산 자락의 북카페, 각종 위스키나 칵테일을 즐기면서 책을 볼 수 있는 마포구 망원동의 바(bar), 책을 읽다 탁 트인 한강을 보며 ‘물멍’이 가능한 카페 등이 추석 연휴 동안 독파민을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공유됐다.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덕수궁 돌담길 인근 A 공간. 낮엔 예약제 공유서재, 밤엔 와인을 마시며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으로 운영된다. 이보람 기자


지자체가 운영하는 각종 독서 프로그램도 인기다. 지난 6일 가을밤 청계천에 앉아 헤드폰을 쓴 채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 ‘야(夜)한 책멍’ 행사는 지난달 24일 신청 접수 하루 만에 참가자 150명이 마감됐다. 지난 5월 19일 잔디밭에 빈백 소파 등을 두고 책을 빌려주는 광진구 아차산 야외도서관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독파민 열풍은 젊은층을 중심으로 형성된 ‘텍스트힙’ 물결의 영향이 크다. 텍스트힙이란 글자를 뜻하는 ‘텍스트(Text)’와 ‘멋있는’ ‘개성있는’이라는 뜻의 신조어 ‘힙(Hip)’을 합친 말이다. 텍스트힙을 추구하는 이들은 독서를 즐기는 모습을 멋있게 여겨 SNS를 통해 자신이 읽는 책을 소개하거나 독서모임, 필사 등 독서 관련 활동 경험을 공유한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텍스트힙은 ‘숏폼’이나 ‘릴스’ 등 단순하고 자극적인 영상 콘텐트에 지친 젊은이들 사이에서 독서가 희소하고 개성을 보여줄 수 있는 활동이란 인식이 번지며 나타난 현상”이라며 “인류의 가장 원초적인 대중 매체인 활자를 소비하고자 하는 욕구로 회귀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유명 아이돌 르세라핌이나 아이브, 배우 문가영 등 연예인의 독서 생활이 유튜브 등을 통해 공개되면서 독서가 ‘힙한’ 취미 활동으로 유행처럼 번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실제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지난 4월 발표한 ‘2023 국민 독서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20대(19~29세)의 독서율은 74.5%로 조사 연령 가운데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Z세대의 독서 열풍은 비단 국내에서만 주목받는 건 아니다. 지난 2월 영국 매체 가디언(The Guardian)은 ‘독서는 너무 섹시하다(Reading is so sexy)’란 제목의 기사에서 시장조사업체 닐슨 데이터를 인용, “2021년 11월부터 2022년까지 종이책 구매의 80%가 Z세대였다”며 젊은층의 종이책 홀릭 현상을 짚었다.

이보람 기자 lee.boram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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