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즈의 고장으로 알려진 전북 임실군의 지명 '임실'은 천오백 년의 오래된 역사와 유래를 간직하여 이야기가 풍부하고 비보풍수(裨補風水)와 관련되어 있다. 임실의 별호(別號)는 조선 시대에 '운수(雲水)'로서 임실현을 운수현이라고도 하였다. 현재 임실동중학교 위치에 조선 시대 임실현의 객사인 운수관이 있었고, 임실의 읍지는 운수지(雲水誌)였다.
조선 시대의 관찬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는 임실의 지명을 "백제 시대에 잉힐(仍肹)이었던 것이 신라 시대에 이르러 임실(任實)로 고쳐졌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 시대에 우리말 지명을 한자로 음차한 '잉힐(仍肹)'을 신라 경덕왕 때 중국식 한자 발음에 더 가깝게 '임실(任實)'로 고친 것으로 보인다. 임실 지역은 시대에 따라 군현(郡縣)의 변동은 있었지만, 지명 '임실'은 백제 시대 이후 1500년 동안 한결같았다.
운수(雲水)라는 임실의 별호에는 풍수지리상 화산(火山)인 고덕산과 관련된 비보풍수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9월 중순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주말에 임실의 지명과 임실의 별호인 '운수'의 유래와 비보풍수의 현장을 찾아가며 역사 문화 탐방을 하였다.
임실의 비보풍수 중심인 고덕산을 임실과 진안의 여러 장소에서 바라보았고, 임실의 백제 시대 치소로 추정되는 성미산성과 방동마을을 찾아갔다. 운수정(雲水井)이 있는 운수봉을 바라보고, 고덕산의 화기를 비보하기 위한 용요산의 죽림암(竹林庵), 임실읍 숲(수정리, 水亭里)와 운수사 미륵석불 등 임실의 비보 풍수와 관련되어 있는 지역을 차례로 답사하였다.
▲ 임실 고덕산 주위 네 방향에서 본 모습(왼쪽 위, 임실 고덕마을. 왼쪽 아래, 임실 삼봉마을. 오른쪽 위, 진안 좌사마을, 오른쪽 아래, 진안 구신마을)
ⓒ 이완우
임실역에서 동북쪽으로 직선 거리로 5km 위치의 임실 관촌면 운수리 고덕산은 금남호남정맥의 장수 팔공산에서 분지한 성수지맥의 산이다. 이 산의 8개 봉우리가 이어진 기암괴석의 가파른 바위 능선은 공룡능선이라고도 한다. 이 산이 풍수지리상으로 화산(火山)이 되어, 그 화기(火氣)가 임실현에 미쳐서 화재가 자주 발생하므로, 수기(水氣)를 늘려야 한다는 비보풍수 사상으로 조선 시대에 이 고을의 별호가 '운수'가 되었다.
임실 성수면 삼봉리에서 바라본 고덕산의 모습은 불꽃 모양으로 보이지 않았다. 진안 성수면 구신리에서 벼잎과 이삭이 밝은 노란색으로 변해가고 들녘을 배경으로 고덕산은 평온한 모양이었다. 진안 성수면 좌산리 들녘에서 바라본 고덕산은 날카로운 바위 능선이 하늘로 솟구쳤다. 임실 관촌면 운수리 고덕마을에서 고덕산을 등산한다. 이 마을에서 바라본 고덕산은 부드러운 봉우리가 이어져 있다. 임실 고덕산이 있는 곳이 운수리(雲水里)여서 흥미로웠다.
▲ 임실 섬진강 옆 성미산(성미산성)
ⓒ 이완우
임실 관촌면 섬진강변에서 성미산을 보았다. 이 산의 오른쪽 끝에 완주광양고속도로가 지나고 고속도로 위로 멀리 임실읍의 북쪽을 지키고 있는 용요산과 운수봉이 보인다. 성미산(430.5m)에는 백제가 신라의 공격에 대비해 쌓은 성미산성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무왕 6년(605) 2월에 각산성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각산성'을 성미산성의 옛 이름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백제의 무왕이 신라와 국경을 맞대고 대립하며 성미산성을 쌓았고, 신라의 태종 무열왕은 군대를 이끌고 섬진강을 따라 이 지역을 통과하여 부안의 주류성을 공격하였고, 후퇴하는 길에 성미산성에 주둔한 백제 부흥군과 전투한 역사적 장소이다.
이 성미산성에서 백제시대 오부명(五部名) 인장와(印章瓦·도장 찍은 기와)가 2007년에 발굴되어 이곳이 백제의 군사적 요충지이며 행정적 거점이었음이 확인되었다. 성미산성이 임실 지역 최초의 중심지로서 잉힐(임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여지도서(1759년)와 임실의 오래된 읍지에서는 방동(芳洞, 성미산에서 섬진강을 건너 있는 마을, 성미산 북쪽 2km 위치)을 옛날 치소(治所)로 기록하고 있다.
이 방동 마을은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임실군(현)의 치소가 있었던 천년 마을이었다. 이 마을 앞에는 '천년 고을' 표지석이 서 있어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 방동 마을에는 섬진강 유역에 농경지를 개척한 황장군 설화와 장제무림 설화가 전승되며, 가까운 곳 섬진강과 절벽의 절경에 사선대 설화가 전승된다. 임실군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적 사실과 설화가 이 지역에 터전을 두고 있다.
지명 임실(任實)을 '임이 사는 고을, 열매가 충실한 고을'이라고 풀이한다. 그러나 백제 시대의 우리말 지명을 음차한 잉힐(仍肹)을 다시 다른 한자로 옮겨놓은 임실(任實)의 뜻을 그대로 이해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잉힐(仍肹)을 '앞 골짜기, 앞 고을'의 의미로 보는 견해가 있다. 백제가 신라와 국경을 마주하는 호남정맥 넘어 섬진강의 앞에 있는 성미산성(각산성)을 가리키는 지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고려 가요 동동의 서사에서 '님(앞, 변이음 림, 잉, 임, 님), 곰(뒤)'의 활용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태종은 1403년에 사냥을 명목으로 임실 관촌 지역을 방문한다. 이때부터 태종의 충신인 마천목 장군의 도깨비보 설화가 방동 마을 섬진강에 전해온다. 태종은 1413년에 임실 강진면과 청웅면(옛 구고현) 지역을 기존의 임실현과 통합하고, 이들 지역의 중심지인 현재의 임실읍 위치로 임실현의 치소를 이동한다. 현재 임실군의 중심지인 임실읍보다 둘레 지역인 관촌면, 강진면, 오수면이 역사적으로 훨씬 오래되었고, 설화도 오래되었다.
어찌 보면 현재의 임실읍 지역은 조선 시대 초기에 새로운 기획도시로 자리 잡은 임실의 치소였다. 그런데 새로 터를 잡은 임실현의 관아에서 고덕산이 왕성한 화기를 내뿜는 자태로 보인다. 운수(雲水)라는 마을이 임실읍 지역에 오래 전부터 있었는지 모르나, 임실의 치소가 새로 이곳에 옮겨온 조선 시대 태종 때 이후로 임실현의 별호가 운수(雲水)가 된 것으로 보인다. 새로 정해진 임실의 치소에 미치는 고덕산의 화기를 수기로 비보하려는 풍수사상의 적용이었다.
▲ 임실 운수봉 운수정
ⓒ 김진영
임실 운수봉 아래에 이르렀다. 이 산 깊숙한 곳에 바위틈에 샘 솟는 운수정(雲水井)이 있다. 이 지역에서는 두곡리 절골 약수터라고 불렀다. 이 샘 운수정이 바로 임실의 별호 운수의 근원이다.
2023년 4월에 이 지역 최고의 읍지인 '운수지(雲水誌, 1675년)'를 발견한 향토역사문화탐구가 김진영 씨는 '운수봉 중턱에 차고 맑은 물이 나오는 샘(운수정)이 있다'는 운수지(1675년)의 기록을 찾아냈다. 그는 가끔 이곳 샘터를 탐방하며 자연 정화 활동을 하고 있다. 김진영 씨는 그가 운영하는 블로그(티스토리, 흘러가는)에 운수정에 대한 설명과 사진을 게재했다.
운수정(雲水井) 위치: 임실읍 두곡리 산91-3 임실읍 소재 용요산 운수봉(490m) 8부 능선(390m) 절골 상부 천연암반 아래 바위틈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석정(石井)이 있는데 아직도 완연하다. 80~90년대에 샘터 주변에 조성한 철봉 등 운동시설이 아직도 남아있다. 샘의 크기는 높이 150cm, 너비 90cm, 샘 깊이 30cm 정도이다.
김진영 씨는 또한 운수지(1675년) 책자에서 임실 고덕산이 8봉이 아니라 9봉으로 기록되었음을 찾아냈다. 임실 고덕산이 풍수지리상으로 화산으로 본다면 9봉으로 인식한 것이 맞다. 숫자 9는 양수(陽數)로서 고덕산의 불기운인 화기와 어울리기 때문이다.
▲ 임실 용요산 죽림암
ⓒ 이완우
용요산 죽림암(竹林庵)은 대숲이 무성하고 느티나무가 거대하여 하늘을 덮었다. 대숲이 우거진 죽림암도 이 지역의 비보풍수 역할을 한다. 숲의 나무(수, 樹)는 물(수, 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임실읍 성가리 원불교 교당 부근이 조선 시대 임실현의 동헌(東軒)이 있었고, 임실동중 운동장에는 객사인 운수관(雲水館)이 있었다. 임실현 관아가 기대고 있는 작은 봉우리는 봉황산이 되었다.
조선 시대 임실 관아의 객사와 군기고 부근에 운수정(雲水井) 샘이 있었다고 한다. 아마 운수봉의 운수정이 위치가 멀어서, 가까운 관아 내에 우물을 운수정으로 정한 것으로 보인다. 현감이 새로 부임하면 처음 이 우물물을 마시게 하였는데, 이렇게 운수정 우물을 마신 현감은 운수정의 물맛을 칭찬하고 선정을 베풀게 되었다고 전한다. 최초의 운수지(1675년) 이후의 다음 운수지(1730년)부터는 운수봉의 운수정은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 임실 숲정이 운수사와 석불입상
ⓒ 이완우
임실천 가까이에 있는 수정마을은 고덕산의 화기를 다스리려고 마을숲을 울창하게 가꾸어서 수정리하고 하였다. 이 마을의 천변에 자리한 운수사(雲水寺)에 넉넉한 얼굴의 석불입상이 있다. 이 석상은 높이 2.54m, 어깨 폭 0.81m의 제법 우람한 형태이다. 이 미륵불상은 세련된 솜씨는 아니지만 얼굴의 표정이 포근하고 친근하며 토속적인 느낌이 강하다. 이 석불은 비보풍수에 의해 고덕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세웠다고 전해진다.
임실천 교량에 서니 고덕산의 연봉이 우뚝 솟았다. 저 고덕산을 중심으로 진안군 백운면과 성수면에서 거쳐, 임실의 옛 치소가 있었던 임실군 관촌면 성미산성을 지나 방동 마을을 탐방하였다. 임실읍으로 되돌아 오면서 운수봉을 바라보고 용요산 죽림암을 거쳐, 임실천 옆 수정리 운수사에서 석불입상을 찾아보며 임실의 역사 문화와 풍수지리 탐방을 마쳤다.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추석 명절을 맞이하여, 천오백 년을 한결같이 이어오는 지명이 더욱 고향과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백제 시대에 잉힐(仍肹)이 신라 시대에 임실(任實)로 고쳐지며 같은 오롯이 같은 이름 줄기로 천오백 년을 이어온 이름의 역사와 유래를 소중하게 알고 지켜가고 싶었다. 잉힐. 참 예스러운 듯, 새로운 듯 정겹고 감미로운 이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향토의 역사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고덕산과 운수봉의 운수정도 많이 찾아가는 산과 샘터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