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하는 눈부신 삶이지만… 엄마의 마음도 돌봄이 필요합니다
여성이 엄마가 되면 그 전엔 상상하지 못한 세계가 펼쳐집니다. 세상의 중심이 통째로 다른 사람에게 옮겨가는 것이지요. 원해서 아이를 낳든 원치 않게 아이가 생겼든 말입니다.
타인에게 삶의 통제권이 있다는 느낌은 절대 유쾌하지 않습니다. 한참 단잠을 자고 있을 때 날카로운 갓난 아기의 울음에 이끌려 이불 밖으로 끄집어내지는 느낌은 출근하기 위한 알람을 듣는 것보다 짜증 나는 일입니다. 모처럼의 외식 자리에서도 어린아이를 먹이고 달래느라 분위기를 즐길 틈 없고, 그마저도 주변에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이며 음식을 입으로 쑤셔 넣으며 끝나기 일쑤지요. 화장실에 가면 엄마를 찾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쫓기듯 뒤처리해야 해야 합니다. 친한 친구를 만나는 것, 전화 통화를 하는 것조차 아이의 낮잠 시간과 활동 시간을 피하다 보면 남는 건 랜선 친구뿐입니다.
갓 엄마가 된 이에게 가장 힘든 것은 수면 부족입니다. 갓난아기는 3~4시간마다 수유를 해야 하는데 수유라는 게 그냥 우유만 먹이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수유를 준비하고 수유하고 트림할 때까지 안아서 토닥이는 데 걸리는 시간은 30분에서 한 시간 혹은 그 이상입니다. 아기가 어릴수록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수유를 마치고 다시 눕는다고 바로 잠에 들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게다가 이상하게 아기의 울음소리는 엄마의 귀에만 잘 들리는 듯 배우자가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엄마는 아이의 기척을 알아차립니다. 그럴 때는 잘 자줘서 고맙지만 어딘지 얄밉기도 합니다.
잠이 부족해지면 우리 마음은 마치 3도 화상을 입은 사람의 피부처럼 극도로 예민해지고 날카로워집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을 일상적인 소음, 말투, 눈빛에도 예민해지고 누가 뭐라고 하면 둑이 넘치듯 눈물이 터져 나옵니다. 스스로 부족한 엄마라고 자책하고 아이를 왜 낳았나 괴로운 마음이 듭니다. 용기를 내서 이런 이야기를 해 보아도 ‘집에서 쉬면서 뭐가 그리 힘드냐?’는 주변의 말에 억장이 무너집니다. 엄마의 마음 건강에 노란불이 켜지는 첫 번째 순간입니다.
분만한 산모의 50~70%는 가벼운 우울감을 경험합니다. 이를 산후 우울감(postpartum blues)이라고 합니다. ‘2021 산후조리 실태조사’에 따르면 초산인 경우, 산모가 24세 이하인 경우, 교육 수준이 높은 산모의 경우 더 많이 우울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출산으로 인해 삶이 완전히 뒤바뀌는 경험은 아무리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해도 항상 상상을 뛰어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산후는 급격한 호르몬 변화를 거치는 시기로 전에 겪지 못한 몸과 마음의 변화를 겪게 됩니다. 이에 더해 쌓여가는 육아용품과 끊임없는 아기의 욕구 속에서 엄마의 욕구와 필요는 점점 뒷전이 돼갑니다. 주변 사람들은 커리어를 향해 한참 저 앞을 달려가는데 자신은 출산 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아 매우 초라해 보이지요. 남들은 별로 힘들지 않게 잘만 키우는 것 같은데 이토록 무능한 자신이 품에 안긴 작은 생명을 건사해낼 수 있을지 두렵고 무기력해집니다. 바람만 불어도 눈물이 터지는, 가장 부서지기 쉬운 이 시기에 ‘너는 뭐가 모자라서 대체 왜 이러는 거니’하는 시선까지 느껴지면 엄마에게 세상은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외로운 곳이고 출산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엄마의 마음 건강에 노란불이 켜지는 두 번째 순간입니다.
다행히 산후 우울감은 주변에서 정서적으로 잘 다독여주기만 해도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서 좋아집니다. 하지만 산모의 약 10~15%에서 우울감이 점점 심해지면서 과도한 죄책감에 휩싸이고 자신이 죽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이 강해집니다. 이것이 산후 우울증(postpartum depression)입니다. 이제는 노란불이 아니라 빨간불이 켜졌습니다. 산후 우울증은 자신뿐 아니라 주변에 매우 위험할 수 있고, 제대로 치료받지 않으면 만성적인 우울증 혹은 기분 장애로 이어질 수 있어서 정신의학적 개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아이가 조금 크면 다시 삶의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간절히 바라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습니다. 아무리 아이가 사랑스러워도 어른처럼, 친한 친구처럼 말이 통하지 않는 아이와 온종일 단둘이 지내는 것은 답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엄마는 하루 종일 배우자가 퇴근하는 시간만을 기다리지요. 하지만 종일 일하느라 지친 배우자의 표정을 보고 나면 하고 싶었던 말을 영영 가슴 속에 묻어 버립니다. ‘차라리 내가 나가서 일하고 싶다’고 생각해도 경력 단절로 인해 예전 그곳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어딘가 공허하지만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라 묻어두고 잊으며 지내려고 노력해봅니다.
엄마의 마음 건강에 노란불이 계속 깜빡입니다. 종일 아이들과 남편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가족이 모두 잠든 후 SNS에서 한참 커리어를 쌓아올리는 친구들의 피드를 보며 부러워하고, 헛헛하고 공허한 마음을 맥주 한 캔으로 달래고 잠에 들면 다시 어제와 같은 오늘이 시작됩니다. 이런 생각은 엄마를 괴롭히고 자존감과 자기 가치감을 심각하게 훼손하며, 정신 건강의 이상으로 나타나, 결국 빨간불이 켜집니다.
엄마의 삶은 어디로 갔을까요? 엄마 역시 한때는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었고, 커리어를 꿈꾸며 일에 매진하는 직업인이었으며 자신을 예쁘게 가꾸고 돌보고 싶은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출산과 육아는 그녀의 삶을 ‘엄마’라는 이름 아래 모두 묶어버렸습니다. 엄마의 이름은 ‘누구누구 엄마’로 바뀌었고 엄마의 커리어는 ‘과거 그런 일을 했던 사람’으로 묻혀버렸습니다. 결혼 전 서로 아끼고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의 자리는 이제 아이 친구 엄마들로 채워집니다. 엄마는 아이의 성장과 성취로 존재 가치를 인정받게 됩니다.
아이와 함께하는 삶은 눈부시며 아이 덕분에 삶에서 느끼는 감정은 풍부해졌을지언정 엄마가 아닌 ‘나’는 점점 소멸하고 ‘나의 삶’은 단조롭고 피폐해집니다. 전업 엄마들이 뭘 해보려 하면 “집에서 애나 볼 것이지”라는 말부터 나오고 “역시 애들한테는 엄마가 있어야지”와 같은 말은 일하는 엄마에게나 일하지 않는 엄마에게나 엄청난 압박이 됩니다. 부족한 게 없어 보이는 그 엄마가 우울증으로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보고, 공황장애로 약을 먹는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여자라서 약한 것도 아니고 엄마여서 강한 것도 아닙니다.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것은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은 엄마만 해야 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 사회에서 성 역할과 부모 역할은 구태의연하며 압도적으로 많은 가정에서 육아와 가사 대부분을 엄마 혼자서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도 마음이 먹먹해지는 것은, 두 아이의 엄마이자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인 저 역시 이 답답한 현실을 물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고구마 100개를 먹은 것처럼 꾸역꾸역 살아내고 있지만, 단박에 해결해 낼 묘책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도 ‘엄마이자 한 개인의 삶’이 지속될 수 있도록 사회의 인식이 바뀌어야 하고 제도와 시스템이 바뀌어야 합니다. 다행히도 우리 사회가 그런 방향으로 서서히 움직이고는 있지만 시스템의 변화만을 기다리기엔 너무 오래 걸릴 듯합니다. 과도기를 살아내는 이 시대 엄마의 마음을 엄마 스스로가 먼저 헤아리고 너그러이 받아주기를, 주변에서 받아주기를, 티끌만이라도 이해해 주기를, 그리고 변하는 시대 속에서 살아남아 10년, 20년 후 ‘참 잘 해냈다’고 스스로를 칭찬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 우리 모두에게 <엄마의 마음 지킴을 위한 안내문>이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엄마의 마음 지킴을 위한 안내문>
(여기에서 ‘엄마’는 주 양육자를 가리킵니다. 가정에 따라 주 양육자가 아빠, 조부모님이실 수도 있습니다. 각 가정의 상황에 맞게 적용해주세요)
- 친정, 시댁, 남편, 도우미, 이모님 등 어떤 찬스를 쓰더라도 엄마가 혼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자.
- 엄마가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일 하나는 꼭 하자. 예를 들어 규칙적으로 정해진 운동을 하거나 배우고 싶었던 것을 배우는 것, 봉사하는 것 등 아이와 상관없는 자존감과 자기 가치감을 높일 수 있는 일을 한다. 직장을 갖거나 유지하는 것도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
- 주로 아이를 재우는 부모가 1주일에 하루쯤은 아이에게 수면을 방해받지 않고 잘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자.
- 아이를 어릴 때 기관에 보내는 것에 너무 죄책감을 느끼지 말자. 하루에 단 한 시간이라도 엄마가 숨을 돌릴 수 있고 그로 인해 아이에게 너그럽게 할 수 있다면 육아와 엄마의 삶의 질이 훨씬 높아진다.
-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자. 힘들다고 말하는 것은 용기 있는 일이다. 도움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자. 그것은 당신이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왔다는 증거다.
[본 자살 예방 캠페인은 보건복지부 및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대한정신건강재단·헬스조선이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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