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미워질 땐,마지막 날인 것처럼 편지를 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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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미 기자]
▲ 진심을 담은 아이의 편지 |
ⓒ 이유미 |
▲ 마지막날이라고 가정하고 쓴 편지쓰기 수업 |
ⓒ 이유미 |
얼마 전 국어시간, 편지 쓰기 단원에서 내가 아이들에게 불쑥 던진 질문이다. 그 질문에 26명의 아이들은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나는 검은색 바탕에 하얀 글씨로 '당신은 지금 천국으로 떠나야 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화면을 띄우고 잔잔한 선율의 음악을 배경화면으로 깔아주었다. 그리고 조용히 하트무늬가 인쇄된 편지지를 한 장씩 뒤로 넘기도록 했다. 내내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보던 아이들은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 편지 쓰기에 돌입했다.
왁자지껄하던 교실이 금새 숙연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장난스레 내게 "선생님 우리 죽은 거예요?" 하며 히죽대던 한 남자아이도 그 분위기에 휩싸여 고개를 숙인 채 숨죽여 무언갈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고요한 교실 안은 딱딱거리는 연필 소리만이 그 공백을 메웠다. 평소라면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며 기다렸을 텐데 몰입하는 아이들의 고개 숙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책상 위에 놓인 편지지에 손이 갔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 마음 깊숙이 뭔가 뜨거운 것이 차올랐고 마치 펜에 날개가 달린 듯 술술 막힘 없이 글을 써내려 갔다.
30분여 쯤 지났을까? 여기저기서 편지의 완성을 알리는 신호가 터져 나왔다. 아이들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할 무렵 나는 첫 번째 주자가 되어 아이들과 함께 열심히 쓴 편지를 낭독해주었다. '사랑하는 아들에게'라고 운을 떼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 졌고 나의 먹먹한 목소리를 감지한 몇몇 아이들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아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메시지의 행간 행간마다 몇 차례의 울음을 삼켰는지 모른다.
아들을 향한 절절한 마음이 아이들에게도 가 닿았는지 교실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 마무리, 엄마가 없어도 지금처럼 씩씩한 아들로 자라고 엄마는 천국에서 아들이 꿈을 이루는 순간까지 응원할 것이며 다시 태어나도 엄마 아들로 태어나 달라,사랑한다는 말을 끝으로 편지를 마무리했다. 그 순간 교실의 공기는 묘하게 바뀌었고 나를 포함한 26명의 아이들은 모두 천국으로 가는 배에 함께 오른 동지가 되었다.
진실한 내 마음이 보이지 않는 선을 타고 아이들에게로 연결되었는지 아이들의 편지는 하나같이 먼지 하나 끼지 않은 투명한 진심으로 가득 채운 내용 일색이었다. 그중 가장 내 마음을 울린 아이의 편지는 단연코 우리 반 장난꾸러기 한 남자아이의 것. 학기 초부터 지금껏 바람 잘 날 없이 지적을 받고, 크고 작은 사건을 일으켜온 그 아이는 늘 내 가슴 속에 돌멩이처럼 걸려 있는 아이였다. 얼마 전에도 친구의 자전거를 부순 문제로 상담 전화를 한 적이 있는 아이다. 행여나 또 장난스러운 발표를 하지 않을까 침을 꿀꺽 삼키며 아이를 응시했다.
사랑하는 부모님께로 시작한 아이의 편지. 오늘 떠나는 날까지 사고만 치고 가서 미안하다는 말이 입 밖에서 흘러나오자 아이들과 내 눈빛이 일제히 아련해지기 시작한다. 얼마 전 친구의 자전거를 부수고, 체육관의 에어컨을 넘어뜨리는 그런 나쁜 짓을 해도 부모님은 나를 포기 하지 않고 혼내주어 감사하다, 그리고 선생님들한테 전화를 많이 받게 했는데 자신이라면 힘들고 창피할 것 같다며 엄마 아빠 잘못도 아닌데 그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엄마가 혼낼 때마다 밉다고 했지만 속마음은 사랑했다고, 효도 못 하고 가서 미안하고 다음 생에는 착한 아들로 태어나 효도 많이 하겠다며 편지를 마무리했다.
늘 장난을 하던 그 아이의 생각지도 못한 말간 진심에 모두가 적잖이 놀란 기세였다. 편지를 읽는 내내 나는 떨리는 아이의 손을 보며 그간 생각 없이 사고만 치고 반성하는 기색 없는 괘씸한 아이라고 오해한 지난 날의 내 자신이 문득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참 고마웠다. 깊은 심연에 숨은 속마음을 가감 없이 수면 위로 드러내 주어서. 그리고 그 진심이 우리 모두의 마음에 큰 울림을 남겨주어서 말이다.
생의 마지막 날이라는 프레임이 아이의 심연에 깊숙이 숨겨둔 속 알맹이 같은 진심을 투명히 드러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해준 셈. 다소 무거운 주제라 수업 직전까지도 고민했었지만 과감히 실행한 내 자신을 폭풍 칭찬해주고 싶었다. 아이의 발표에 물꼬를 튼 다른 아이들도 너도 나도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었고 그 순간 우리 모두의 마음엔 전에 없이 뜨듯한 무언가가 가득 차올라 가뜩이나 여름의 열기로 후끈한 교실을 더욱 훈훈하게 만들었다.
반 아이들과 내가 오늘 마지막이라고 여기며 편지를 쓴 이 순간은 아마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오롯이 이곳에 있는 우리만이 몸소 경험한 생생한 감각이랄까. 또 아이들과 나는 이 활동으로 앞으로의 인생을 대할 때 필요한 더없이 귀한 힌트를 하나 얻어냈다. 오늘 보내는 하루를 마지막처럼 생각하면 모든 게 또렷해진다는 사실.
평범한 하루에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필터를 씌우면 누군가를 향한 미움, 화, 괘씸함이라는 부정적인 마음이 조금 순화될지도 모른다. 더 화낼 것 덜 화내고, 덜 사랑할 것 더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함께 보내는 마지막 날인데 소중한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할퀴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수업을 하고 나니 불쑥 떠오르는 한 장면이 있었다. 언젠가 본 한 티브이 프로그램. 연예인 션이 등장했던 부분인데 한 진행자가 어떻게 그렇게 아내에게 한결같이 잘하느냐는 질문에 션은 웃으며 대답한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어쩌면 내게 허락된 시간이 오늘 뿐일 수도 있는데 오늘 사랑하는 사람과 사소한 일로 싸우고 미워하면 얼마나 후회할까? 사랑하기도 부족한 오늘이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사랑하며 살겠다"라고. 그 말이 아직 내 마음에 스며들어 있는 것을 보면 꽤나 인상적이었나보다.
지리멸렬하게 반복되는 하루하루, 그 하루가 덧없고 지루하게만 느껴질 때, 그리고 곁에 있는 가족의 사랑이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질 때. 그래서 그 가족이 너무 귀찮고 미워질 땐,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하루를 보내면 어떨까? 국어시간에 마지막이라고 가정하고 편지를 쓰며 소중한 진심을 드러내 모두의 가슴을 절절하게 울린 반 아이처럼 말이다.
곧 다가오는 추석 명절, 모두가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마음을 한 구석에 장착한 채, 자주 못 본 그리운 가족들을 찾아 농밀한 시간들을 보내며 평소 전하지 못한 진심을 듬뿍 전하는 따뜻한 명절을 보내면 어떨까.
덧붙이는 글 |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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