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해질 내일의 나에게…‘미룬이 사회’ 코리아

명순영 매경이코노미 기자(msy@mk.co.kr) 2024. 9. 14.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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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삼수 예사…자격증 취득 또 몇 년
좋은 직장 찾다 보니…30대에 첫 출발

‘시작이 제일 무서운 미룬이 / 완벽하지 못할까 봐 지금이 / 내일의 나에게 일단 미루지 / 그러다가 돼버렸지 미룬이’.

지난 5월 코미디언 이제규 씨가 발표한 ‘미룬이’라는 곡이 화제를 모았다. 미룬이란 ‘미루다’와 ‘어린이’의 합성어다. 시작을 잘 하지 못하고 완벽함을 두려워하다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노래 속 가사와 딱 들어맞는 건 아니지만 한국 젊은 층에서도 ‘미룬이’ 현상이 나타난다. 사회가 인정하는 눈높이를 충족시키지 못했다고 판단한 이들이 취업을 머뭇거린다. 그러다 보니 외국에서는 이미 상당한 경력을 갖춘 30대가 한국에선 신입사원으로 사회생활 첫발을 내딛는다. 치솟는 부동산값에 내집마련 걱정으로 결혼이 늦어지고 저출생 사회로의 속도는 빨라진다. 결국 산업 일꾼은 늙어가고 기업 활기는 떨어진다. ‘적령기’라는 단어조차 사라진 한국. 이대로 괜찮은 걸까.

서울 소재 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한 A씨. 현역 시절 지방대에 붙은 그는 삼수 끝에 ‘인서울’ 대학 진학에 성공했다. 1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오느라 2년을 쉬었다. 금융사에 진학하고 싶었던 그는 또다시 1년을 휴학하며 각종 자격증을 공부했다. 커뮤니케이션은 금융사에 진학하기에는 적합한 전공이 아니라고 판단해서다. 금융사에 걸맞은 ‘스펙’을 쌓기 위해 투자자산운용사와 금융투자분석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졸업 유예를 신청하며 취업을 준비했지만 만만치 않았다. 힘겹게 한 투자자문사 인턴 자리를 구했다. 이후 증권사와 운용사 단기 인턴 3곳을 거친 뒤인 27살에 소형 운용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회사 규모와 직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대형 금융사에 입사 지원서를 계속 냈고, 3년 만에 10위권 내 증권사에 신입사원으로 합격했다. 30대가 돼서야 A씨 눈높이에 맞는 일자리를 찾은 셈이다. A씨는 “취업이 늦어졌지만 결국 이름을 들으면 알 만한 증권사에 취업했기 때문에 만족한다”며 “원하는 일을 찾은 만큼 늦은 출발을 보상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국 젊은 층의 사회 진출이 늦어지고 있다. 4년제 대졸자가 졸업까지 걸리는 기간은 평균 5년 4개월이다(2023년 경제활동인구조사 청년층 부가조사). 4년 만에 졸업하는 학생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또한 올해 15~29세 취업자들이 대학 등 최종 학교를 졸업한 후 첫 직장을 얻기까지 걸린 기간은 평균 11.5개월이다. 관련 통계가 집계된 2004년(9.5개월) 이후 역대 최장 기간이다. 이 시간을 다 합치면 대학 입학 뒤 7년은 돼야 첫 직장을 얻는다. 취업난이 심한 데다 대졸자 눈높이에 맞는 직장을 얻기 위해 시간을 희생하는 셈이다.

사회생활 출발부터 늦어지니 결혼과 출산도 연쇄적으로 미뤄진다. 40대 들어 결혼하는 일이 흔해졌고, 노산의 기준이라는 40대 여성 출산율이 이미 20대 초반 여성의 2배가 됐다. 이제 한국에서 취업, 결혼, 출산에 관한 ‘적령기’는 사라졌다. 그야말로 한국은 ‘지체(遲滯) 사회’다.

고질적인 일자리 미스매칭

높은 집값에 결혼·출산 연쇄 지체

지체 사회가 된 요인은 복합적이다.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좋은 일자리를 원하는 청년층 욕구를 꼽는다. 치열한 글로벌 경쟁에 직면한 기업이 전문성이 검증된 경력사원을 선호하며 신입사원 일자리는 더 줄었다. 젊은 층이 좁은 문을 뚫고 신입사원에 도전하다 보니 더 강도 높은 취업 준비에 내몰린다는 분석이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이를 ‘사회부과 완벽주의’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사회가 요구하는 수준에 맞추라는 완벽주의를 강요받는다는 의미다.

높은 집값과 자녀 교육비도 한국을 ‘지체 사회’로 몰아가는 주요 이유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지난해 연구를 보면 결혼을 위한 최소 자산은 1억원이다. 최근 집값이 급등하며 1억원조차 큰돈으로 여겨지지 않는 시대가 됐다. 부동산값은 천정부지 치솟고, 자녀 교육비 부담이 큰 한국 사회에서 젊은 세대에게 결혼과 출산을 강요하기는 무리다.

다만, ‘속도’에 예민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도 나온다. 지체라는 말은 정해진 기한을 맞추지 못했다는 뜻이다. ‘정해진 기한이 있다’는 통념이 맞지 않고, 수명이 늘어난 만큼 젊은 층의 연쇄 지체를 비판적으로 볼 이유가 없다는 의견이다. 과거 노인의 기준이었던 60세가 지금은 한창 활발하게 일할 시기라는 점으로 간주된다는 점도 이를 방증한다. 세계건강기구(WHO)는 노인 연령을 65세로 규정하고 있지만 한국과 일본 등에서 노인의 정의를 70세나 75세로 바꾸자는 논의가 활발하다.

[명순영 기자 myoung.soonyoung@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76호 (2024.09.11~2024.09.26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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