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쩌다 ‘미룬이’가 됐나 [‘미룬이 사회’ 코리아]
“돈 더 벌어서”…이상 꿈꾸며 결혼 ‘머뭇’
한국인의 인생 시계가 조금씩 늦춰진다. 대입 수능에 여러 번 도전하는 ‘N수생’ 비중은 커지고, 취업 시장에선 충분한 스펙에도 ‘아직 부족하다’며 공부에 천착하는 청년이 늘어난다. 결혼은 원하지만 당장은 할 수 없다며 결혼을 뒤로 미루는 사례도 감지된다. 그야말로 ‘전방위 지연’이다. 분명 자연스러운 현상은 아니다. 지체 사회를 만드는 요인을 살펴봤다.
마침표 없이 달리는 청년들
심리학에는 ‘지연 생활 증후군(Delay ed life syndrome)’이라는 표현이 있다. 1997년 러시아의 세르킨(Serkin, V. P.)이라는 학자가 러시아 북쪽 사람 심리를 연구한 논문을 작성하며 언급한 개념이다. 스스로 정한 마지노선이 있고 이를 넘어설 만큼 충분한 준비가 돼야 실행에 옮긴다는 의미다. 일상 속 사례도 여럿이다. 여름휴가 시즌, 곳곳에서 수영장 파티가 열린다. 하지만 모든 이가 즐기는 것은 아니다. 일부는 “아직 파티에 어울릴 만큼 몸이 준비되지 않았으니 내년에는 꼭 해야지”라며 꺼린다. 누구도 파티 참여를 제한하거나 막지 않지만, 자체 기준선을 정하고 넘어서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한국 청년층 사이에도 이 같은 심리가 만연하다. 대표 사례가 N수생 급증이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따르면 지난해 대입 수능을 치른 N수생(검정고시 포함) 비율은 35.3%(17만7942명)로 28년 만에 최대치다. 올해도 N수생 수는 최소 17만명을 넘어설 전망이다. 종로학원에 따르면 2025학년도 수능을 보는 N수생은 17만7849~17만8632명으로 추정된다.
학령인구는 줄어드는데, N수생은 늘고 있는 기현상이다. 단순히 학생들의 ‘공부 욕구’가 강하기 때문이라고 풀이하기에는, 과도하게 높다. 재수종합반을 다니며 3번째 수능을 준비 중인 조석원 씨(가명)는 N수를 하며 눈높이가 더 높아졌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앞선 재수에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훌륭한 점수였지만, 원하는 대학 진학에는 모자랐던 것. 유사 학과를 보유한 다른 대학 지원 생각은 없었느냐는 질문에 조 씨는 “재수를 했으니 최소 A대 정도는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삼수를 하는 지금은, 그런 마음이 더 짙어졌고 나를 증명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취업 시장도 다를 바 없다. 끝없는 ‘스펙 쌓기’의 연속이다. 블라인드 채용 확대 등으로 불필요한 ‘오버 스펙’ 자격증 경쟁은 없어졌지만 ‘경험 스펙’ 경쟁이 한창인 탓이다. 고용노동부 산하 재단법인 교육의봄이 지난 2~5월 매출 기준 상위 1000대 기업 중 150곳의 입사 지원서를 분석한 결과, 전통적 스펙으로 꼽히던 외국어 점수와 학점 외에도 수상 이력(70%), 봉사활동 경험(68%) 등 추가적인 경험 사례를 요구한 곳이 10곳 중 6~7곳에 달했다. 해외 경험을 물은 기업도 40%에 달했다. 이 때문에 취업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 화두 중 하나는 ‘최소 기준’이다. “인턴은 최소 몇 번 해보는 게 좋을까요” “교환학생 경험이 없는데, (오픽 등) 영어는 최소 어느 정도 맞춰야 할까요” 등이다. 저마다의 기준을 토대로 답글이 달린다.
일부는 일자리를 알아보다 막막한 마음에 ‘도피성 대학원 진학’을 택하기도 한다. 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경제활동인구조사 청년층 부가조사 결과’에 따르면 청년 미취업자 중 “진학을 준비 중”이라고 밝힌 비율은 전체 10.9%에 달했다.
전문가들은 청년층이 내재화한 마지노선이 ‘자의적 기준’이 아닌 게 더 문제라고 지적한다. 떠밀리듯 N수를 결정하고 대학원 진학을 선택하는 이가 상당수라는 것. 일각에서는 사회부과적 완벽주의(Socially-prescribed perfectionism) 결과물이라고 설명한다. 사회부과적 완벽주의는 조직이나 타인의 기대감에 부응하기 위해 완벽성을 추구하는 태도를 말한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많은 이들이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높은 기준을 다 해내려고 끝없이 노력한다”며 “정말 문제는 이들이 어느 순간 ‘나는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라고 자기방어하며 취업 자체를 포기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점”이라고 꼬집었다.
“30대에 1억원? 쉽지 않은데…”
주위를 둘러보면 40대 초반 신혼부부가 20대 초반 신혼부부보다 흔한 세상이 됐다. 통계로도 나타난다. 통계청 국가통계포털(KOSIS)에 따르면 지난해 40대 초반(40~44세) 여성 혼인 건수는 1만949건. 20대 초반(20~24세) 1만113건보다 많았다.
미혼 남녀는 현실적 장벽이 결혼 연령을 늦춘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 5월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만 25~49세 남녀 2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결혼·출산·양육 인식 조사’를 발표했다. 조사에 따르면 미혼 남녀 10명 중 6명(61%)이 결혼 의향이 있다고 응답했고, 그들 중 75.5%가 아직 미혼인 이유로 ‘경제적 부담’을 들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해 발간한 ‘가족형성과 사회불평등 연구’ 보고서 결과도 마찬가지다. 최선영 부연구위원팀은 40명의 미혼 남녀를 만나 심층면접 조사를 벌였는데, 대부분 남녀는 결혼을 결코 기피하지 않았다. 다만 당장 할 의사가 있지 않다고 응답했다. 연구팀은 이를 ‘결혼 지연’ 행위라고 규정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대다수가 ‘자산 1억원’을 결혼 준비 과제로 평가했다. 전셋집이라도 마련하려면 1억원은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
심층면접에 응한 1992년생 남성 A씨(항공기계 조립원)는 “36살까지 1억원을 모은다. 그러면 그때부터 결혼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그게 안 된다고 하면, 그냥 지금 늦어진 생활 그대로 쭉 살아가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1989년생 여성 B씨(대기업 정규직)는 1억원을 결혼에 필요한 자원이자 정상적 경제 활동을 해왔다는 ‘정산서’로 해석했다. B씨는 “제 또래라면 사회생활을 그래도 8년 가까이 혹은 그 이상 해온 분들일 텐데,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게 아니라면 1억원 정도 자금을 모으지 못했다는 건…”이라며 말을 흐렸다.
하지만 물리적 시간을 고려하면 결혼 적령기(30대 초반) 1억원 확보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의견이 다수다. 이를 해결 못해 자연스레 결혼 연령이 높아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1989년생 남성 C씨(구직 중)는 “남성은 병역 의무가 있고, 2년 정도 공백이 불가피하다”며 “대학을 졸업하고 아무리 빨라도 20대 후반이 돼야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결혼 적령기를 30대 초반으로 본다면 약 4~5년 만에 1억원이라는 돈을 모아야 한다. 그럼 1년에 2000만원 정도 저축을 해야 하는데, 처음부터 그만큼 소득이 높은 사람은 많지 않은 게 현실”이라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결혼에 ‘전제 조건’이 붙는 현상을 보며 계층화 현상을 우려한다. ‘30대 초반 1억원’ 등 구체적 조건을 개인 힘으로 달성하기 어려운 만큼, 결혼 역시 부모 능력에 의존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것.
한국연구재단 학술지 사회복지정책에 등재된 ‘주거비 부담이 결혼 이행에 미치는 영향’ 논문은 “더 이상 단칸방에서 애 여섯 낳아 키우던 과거를 이야기하며 ‘정신 승리’를 외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며 “우리나라는 결혼 때 목돈이 필요한 경우가 많은데, 자력으로는 어려워 청년들은 부모의 경제적 조력을 상당 수준 의존하게 된다. 부모의 능력에 따라서 결혼의 시점이 달라지는, 사회적 불평등·계층화가 양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상·현실 괴리…어두운 면 부각 우려
“청년의 이상 자아(Ideal self)와 현실 자아(Real self) 간극이 벌어지고 있다. 이상 자아가 현실 자아와 비슷하거나, 조금 높을 때가 가장 바람직한데 현재는 그렇지 못하다. 중요한 건 왜 이런 일이 생기느냐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상 자아가 너무 높아진 탓이다. 요즘은 전통 미디어뿐 아니라 소셜미디어(SNS)로도 ‘화려한 삶’을 엿볼 수 있다. 이 때문에 눈높이가 높아지고 갈망이 커져 스펙만 쌓거나 끝없는 공부에 몰두하는 이들이 늘고 있는 것 같다.”
‘지체 사회’를 향한 곽금주 교수의 또 다른 진단이다. 미디어 환경이 비교 심리를 강화해 개인의 마지노선을 높이고 결국 ‘진학-취업-결혼-출산’ 모든 분야의 ‘연쇄 지연’을 이끈다는 설명이다.
SNS는 여전히 ‘나는 행복해’를 과시하는 게시물이 대부분이다. 페이스북에서 인스타그램·유튜브로 채널만 달라졌을 뿐이다. 1990년대생이 바라보는 대한민국을 서술한 책 ‘K를 생각한다’에 따르면 청년층은 SNS 속 타인의 화려한 삶을 보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다.
최근에는 또 다른 미디어 문제도 부각된다. 전통 미디어를 중심으로 결혼·출산 관련 부정적 인식이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프로그램 속 출연 부부는 상대에게 폭언을 하고, 아이는 폭력을 행사한다. 프로그램을 본 시청자들은 결혼과 육아에 두려움을 갖는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결혼 공포증 걸리겠다”거나 “아이도 적게 태어나는데 퀄리티도 떨어지는 거냐”는 등의 부정적인 글이 여럿이다.
미디어가 결혼 등에 직접적 영향을 준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양문희 상지대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의 ‘육아 예능 프로그램 시청과 결혼 기대감, 가족 가치관의 관계 연구’가 대표적이다. 해당 논문은 육아 예능 프로그램 ‘슈퍼맨이 돌아왔다’ 시청과 결혼·가족 인식 상관관계를 조사했다. 양 교수는 “TV 프로그램 시청이 결혼과 가족의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며 “(육아에 긍정적인) 프로그램을 많이 시청할수록 결혼에 대한 로맨틱한 기대감과 배우자와의 행복한 관계에 대한 기대감이 더 높이지는 경향이 있다”고 밝혔다. 반대로 말하면 부정적 프로그램은 결혼과 출산 기대감을 떨구게 된다.
[최창원 기자 choi.changwo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76호 (2024.09.11~2024.09.26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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