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아름다운 세상, 그것만 안고 가자"…박경리의 마지막 시

이영희 2024. 9. 14.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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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토지』를 쓴 소설가 박경리(1926~2008)는 200여편의 시를 쓴 시인이기도 했다. 1955년 김동리 작가의 추천을 받아 단편소설 ‘계산’으로 등단하기 한 해 전, 당시 재직 중이던 상업은행 사보에 ‘바다와 하늘’이라는 시를 발표했다. 소설을 쓰면서도 틈틈이 시작에 매진해 유고시집을 포함해 『못 떠나는 배』 『도시의 고양이들』 『자유』 『우리들의 시간』 등 5권의 시집을 남겼다.

소설가 박경리(1926~2008)의 생전 모습. 중앙포토


지난 2008년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나왔던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다산책방)가 미발표 시 5편을 담아 16년 만에 새롭게 출간됐다. 미발표 시들은 강원도 원주에 있는 토지문화재단 수장고에서 새롭게 발견한 작품들이다. 재단 직원들이 작가의 개인 물품들을 정리하던 중 생전 사용하던 수첩을 발견했는데, 그 안에 5편의 시가 담겨 있었다. 두 편은 제목이 달려 있었지만 세 편에는 제목이 없어 작가의 외손자인 김세희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이 제목을 붙였다.

처음 공개되는 미발표 시에는 생명에 대한 찬사와 죽음에 대한 성찰이 동시에 담겼다. ‘생명’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작가는 단풍나무와 해당화, 채송화 등 식물의 강한 생명력에 감탄하며 “서로가 서로의 살을 깎고/ 서로가 서로의 뼈를 깎고/ 살아 있다는 그 처절함이여”라고 노래한다. ‘그만두자’라는 가제가 붙은 짧은 시에서는 “죽어 흙이 될지/ 죽어 영혼이 승천할지/ 그 누가 아무도 모른다/ 다만 내가 본 아름다운 세상/ 그것만 안고 가자”라고 썼다.

박경리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표지. 사진 다산책방


작가는 생전에 유고 시집 출간을 위해 60편의 시를 쓰려 했으나 건강이 악화하면서 이를 다 채우지 못했다고 한다. 이렇게 쓰인 44편의 시에는 문학 작품 뒤에 감춰져 있던 ‘인간 박금이(박경리 작가의 본명)’가 생생하게 담겼다. ‘나의 출생’이라는 시에서는 “계집아이의 띠가/ 호랑이라는 것도 그렇거니와/ 대낮도 아니고 새벽녘도 아니고/ 한참 호랑이가 용을 쓰는/ 초저녁이라/ 그 팔자가 셀 것을 말해 뭐 하냐”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내 어머니도 글 모르는 까막눈이었지만/ 고담 마니아였을 뿐만 아니라/ 책 내용을 줄줄 외는 녹음기였다”(‘이야기꾼’)며 자신의 재능이 어머니에게서 온 것임을 고백하기도 한다,

삶의 마지막을 향해 가며 그는 인생의 짐들로부터 많이 가벼워졌다고 고백한다. ‘천성’에서는 “어쩌다 글 쓰는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고/ 고도와도 같고 암실과도 같은 공간/ 그곳이 길이 되어 주었고/ 스승이 되어 주었고/ 친구가 되어 나를 지켜 주었다”며 글쓰기가 자신을 지탱하는 힘이었다고 말한다.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라고 회고하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옛날의 그 집’)고 했다.

다산북스는 박경리 작가의 『토지』 전권을 복간한 데 이어 이번 유고시집을 비롯해 에세이와 시집 등을 차례차례 다시 펴낼 예정이다. 한국 문학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박경리의 방대한 작품들을 한데 모으는 이번 시리즈에는 작가 사후 새롭게 발굴된 미발표 유작들도 담긴다.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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