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차·퇴직금 못 받아도 참아요"…불법체류자 쉬쉬하는 공장들[외노자 절벽]
높은 비자 장벽…양산되는 불법체류자
편집자주
2004년 8월 필리핀 근로자 92명의 입국으로 시작된 외국인노동자(이하 외노자) 고용허가제가 올해 20주년을 맞았다. 외국인노동자 숫자는 지난해 말 기준 92만명으로 지난 20년간 1만배 늘었다. 내국인들이 기피하는 3D업종 인력을 충당하고, 더욱 빨라지는 저출산·고령화 기조를 감안하면 앞으로 훨씬 많은 외노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외노자들은 비자 장벽에 가로막혀 숙련공이 되기 전에 추방되거나 불법체류자로 잔류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저출산으로 인구 감소가 시작된 일본 등 주변국가들이 앞다퉈 이민장벽을 낮추며 외노자들의 정착을 적극 유도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향후 국가간 외노자 쟁탈전이 예상되는 상황이지만 한국은 이민정책을 주관할 컨트롤타워조차 만들지 못해 불법체류자만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한국의 외노자, 이민정책의 현주소와 함께 지속가능한 성장과 노동가능인구 확보를 위한 바람직한 정책 방향에 대해 짚어봤다.
경기도 고양시 이민자통합센터에서 만난 방글라데시 국적의 싸이두루(28)씨는 한국에 온 지 8년이 지났지만, 비자 연장문제로 밤잠을 설치고 있다. 그는 외국인노동자 고용허가제에 따라 E-9(비전문취업) 비자로 입국했다가 4년10개월 뒤 비자기한 만료로 본국에 돌아갔다가 6개월 뒤 E-9 비자 연장에 성공해 한국에 다시 돌아왔다. 이후 잠을 줄이며 한국어능력시험(TOPIK) 점수를 높여 올해 5월에는 기간제한 없이 체류연장이 가능한 E-7(전문직) 비자 취득에 성공했다. 그러나 매년 사회통합프로그램과 TOPIK 성적을 관리하지 못하면 E-7 비자 유지가 어렵기 때문에 주말마다 계속 교육을 받으러 센터에 나와야만 한다. 그는 "그나마 나는 매우 운이 좋은 편"이라며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친구는 한국어를 제대로 못해서 E-7 비자 전환이 안됐고, 결국 불법체류자가 됐다"고 말했다.
싸이두루씨처럼 E-9 비자로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노동자들에게 E-7 비자 전환은 하늘의 별따기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에 따르면 지난해까지 E-7 비자 체류 인원은 3만1051명으로 E-9 비자 체류인원 29만7733명 대비 10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그나마 올해부터 매년 2000명으로 제한되던 E-7 비자 전환 인원을 3만5000명으로 확대하면서 올해 7월말까지 E-7 비자 체류인원은 5만5369명으로 늘어났지만, 여전히 E-9 체류인원(32만9911명) 대비 6분의 1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비자 전환에 실패한 사람들은 한국에 남으려면 불법체류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는 숙련공을 양성해 산업의 기반이 될 인력으로 만드는 중장기적인 이민정책이 아닌, 여전히 단기적인 노동수급에 초점이 맞춰진 외국인노동자 고용허가제의 부작용이다. 고용허가제는 제조업, 건설업 등에서 외국인이 일할 수 있도록 정부가 고용을 허가해 주는 제도로 2004년부터 실시됐다. 한국과 고용허가제 협약이 체결된 베트남,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필리핀 등 아시아 16개국의 노동자들은 E-9 비자를 통해 국내에 들어오며,근로기준법과 최저임금을 적용받는 대신, 비자 만기가 되면 본국으로 돌아가야한다.
E-9 비자의 만기는 4년10개월이며, 한차례 연장할 수 있다. 연장을 위해서는 6개월간 본국에 머무르다가 다시 한국에 돌아와야한다. 이렇게 하면 최대 9년8개월간 E-9비자로 한국에서 일할 수 있다. 이후에도 한국에 머물며 일을 하기 위해서는 E-7 비자를 받아야만한다.
E-7비자로 전환 하기 위해서는 국내에 4년 이상 취업활동을 했다는 증명서와 TOPIK 시험점수, 사회통합프로그램 이수 증명 등을 받아야하는데, 모두 통과하기 쉽지 않다. 먼저 국내 4년 이상 취업활동 증명서를 받으려면 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에서 어떤 갑질을 당하더라도 무조건 참고 다녀야한다. 싸이두루씨는 "한국어도 잘 모르니 사장이 하라는대로 계약서에 서명하고 연차도 못 쓰는 경우가 많다"며 "임금인상도 안되고 퇴직금을 못 받기도 한다. 추방당하지 않기 위해 이런 부당한 일들을 참고 견디는 동료들이 많다"고 말했다.
TOPIK시험과 사회통합프로그램 교육도 이수하기 어렵다. 싸이두루씨는 "대부분 교육이 주중에 이뤄지는데 우리는 마음대로 연차를 못쓰기 때문에 사람이 몰리는 주말프로그램을 신청해야한다"며 "주말수업은 조기마감 되고 한반에 25명 정도 씩만 받다보니 신청 자체가 하늘의 별따기다. 교육만 1년 넘게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다"고 지적했다.
10년간 불법체류자 2배로 급증…"이미 통제 불가"비자 갱신에 실패해 발생하는 불법체류자는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10년 가까이 일을 배운 외국인노동자를 놓치기 싫은 고용주들 사이에서는 불법체류자가 된 외국인근로자들을 쉬쉬하며 계속 고용하는 관행까지 생기고 있다. 이로인해 실제 불법체류자 숫자도 2014년 이후 10년간 2배로 급증했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 통계연보에 공개된 지난해 말 기준 국내 외국인 불법체류자 숫자는 42만3675명으로 2014년 20만8778명의 2배 이상으로 불어났다. 공식적인 취업 비자를 통해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외국인노동자 숫자(92만3000명)의 절반에 해당하는 외국인들이 불법체류자로 국내 노동시장에 들어와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3D업종이라 불리며 내국인이 기피하는 건설, 제조업 비숙련노동시장을 외국인노동자들이 채우고 있다. 이미 각종 제조업과 조선업 등 여러 산업분야에서 주요 인력이 된 이들을 모두 내쫓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올해 7월 기준 전체 고용보험 신규가입자는 22만2000명으로 이중 내국인은 17만4000명, 외국인은 4만8000명이다. 고용보험 상시가입자 1544만5000명 중 외국인노동자가 23만8000명으로 1.54%에 불과한 것을 감안하면 내국인보다 신규가입자 증가율이 매우 높은 셈이다. 이들 중 89% 이상은 제조업 종사자들이다.
조선업 분야에서는 지난해 1~3분기 신규 충원된 인력 중 외국인노동자가 1만2359명으로 전체 신규 인력의 86%에 달한다. 이들 없이는 산업 자체가 유지될 수 없는 수준인 것이다.
안복영 한국이민재단 행정사합동사무소 대표는 "이미 불법체류자 문제는 정부가 상황을 통제할 수 없을 정도 규모가 커졌다"며 "수십만명을 모두 비행기 태워서 자국으로 돌려보낼 수도 없고 그렇게 한다면 한국 제조업이 휘청이게 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저출산 기조로 앞으로 외국인노동자 비중이 더 높아질 것이기 때문에 대안 마련이 시급하다"고 했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김진선 기자 caro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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