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고시 치른 골프 고수 없다[정현권의 감성골프]
한 동반자가 티잉 구역(Teeing)에서 한참 기다리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스쳐 들은 캐디가 초보 2명 돌보느라 앞 팀 캐디도 정신없이 바쁜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도 검정고시 치고 백돌이 깬 것 아니니까 조금 느긋하게 기다리지 뭐.” 옆에서 드라이버를 만지작거리던 또다른 동반자가 응수했다.
초보 백돌이 시절엔 클럽을 들고 뛴 기억밖에 없다. 입문시킨 선배가 하도 진행을 강조하는 바람에 유격훈련 하듯 필드를 누볐다. 평지와 언덕을 롤러코스터처럼 타고 다녔다.
골린이(골프+어린이)를 두고 선배나 친구들이 많이 놀렸다. 아내마저 “오늘도 백점 받아 오셨네요”라고 말했다.
“한 타가 아쉽다”는 고수의 한탄을 백돌이가 이해할 턱이 없었다. 110타를 치는 사람에게 2타를 더 치거나 1타를 줄이는 게 무슨 의미인가.
변태라고 놀릴 게 아니라 더블 보기를 범하지 않는 매니지먼트에 후한 점수를 주어야 옳다. 골프 경륜이 쌓일수록 버디 잡는 것 보다 더블 보기를 범하지 않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
골프를 좀 한다는 사람도 여차하면 순식간에 100타를 넘긴다. 노터치룰을 엄격히 적용하면 보기 플레이어라고 자처하는 골퍼 절반 이상이 백돌이로 가야 할지도 모른다.
첫 홀과 마지막 홀 올파, 멀리건, 컨시드 같은 한국형 룰을 모두 없애면 본인이 내세우는 타수에 10타를 더해야 맞을 수도 있다. 80대 타수를 친다는 필자도 100타를 넘기기 일쑤다.
백돌이는 서럽고 억울하다. 3퍼트를 놓치면 동반자들이 그냥 공을 주우라고 말한다. 짓궂은 농담이 난무한다. 공 대가리를 때렸다(토핑∙Topping)고 해서 “앞으로 대가리 없는 공을 쓰라”는 멘트를 날린다.
분명 더블 보기인 것 같은데 동반자가 트리플 보기라며 제동을 건다. 서울대 출신인데도 타수 복기가 잘 안된다. 이상하게 캐디는 항상 1타를 더 적는다.
백돌이에겐 세상 모든 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 같다. 내 차례만 되면 바람이 불고 동반자 3명은 모두 잘 치는 데 나만 못 치는 것 같다.
어쩌다 핸디를 받고 내기를 하는데 배판만 부르면 항상 OB(Out of bounds)를 낸다. 충분한 핸디를 받고 내기에 끼었다가 드물게 돈을 따기라도 하면 두 배로 물어낸다.
캐디가 가리키는 목표물이 내겐 무용지물이다. 고수 공은 보는 데로, 중수 공은 치는 데로, 하수 공은 걱정하는 데로 간다는 말이 딱 그대로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상황도 있다. 분명 공이 핀에서 같은 거리에 들어오면 동반자들이 OK(컨시드∙Concede)를 주었는데 내리막에선 말이 없다.
티오프(Tee-off) 전에 전날 과음했거나 허리와 팔이 아프다는 동반자가 꼭 있다. 그런데도 스코어가 좋은 것을 보면 신기하다. 밑밥을 깔아놓는 엄살이라는 걸 알 턱이 없다.
백돌이는 부산하다. 골프장에 와서야 양말과 모자를 놓고 온 것을 안다. 클럽하우스 정문에 맡겨둔 캐디 백을 그냥 놓고 오는 경우도 허다하다.
보스턴 백을 골프장에 두고 온 걸 귀가해서는 깨닫고 골프장에 연락해 며칠 뒤에 택배로 받는다. 군대를 갔다 오고 대학까지 나온 내가 저능아인지 의심된다. 골프장에선 이상하게 동시에 두 가지를 해내지 못한다.
대다수 골퍼는 1년 정도 지나야 백돌이에서 탈출한다. 남사스럽다며 조용히 자축연을 갖는 골퍼도 있다.
“우리도 검정고시를 치르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라는 동반자 말이 귀에 꽂힌다. 앞 팀 진행이 늦더라도 그럴 사정이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여유를 가지려고 한다. 조급하면 바로 OB다.
정현권 골프칼럼니스트/전 매일경제 스포츠레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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