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윤의 딴생각] 엄살이 필요한 나이

2024. 9. 14.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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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엄살쟁이다. 나이를 먹으니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며 하루가 멀다고 엄살을 부린다. 매일 아침 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눈가에 눈곱도 뭣도 아닌 것이 진득하게 꼈다며 휴지를 찾고, 속이 부대껴서 밥이 넘어가지 않는다며 젓가락질 한 번에 배를 한 번 문지르고, 피폐한 정신을 달랠 길이 없다며 구슬픈 선율로 오카리나를 불기도 한다.

심지어는 발병하지도 않은 병을 미리 걱정하며 장거리 여행은 떠나지도 않는다. 당신 나이에 이역만리에서 아프기라도 하면 방법이 없다나 뭐라나. 아빠 친구들 사이에서는 남미 여행이 유행이라는데, 아빠는 친구들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남미? 죽으러 가는겨.”

엄마는 그런 아빠가 불만이다. 좀처럼 집을 비우지 않는 아빠의 삼시 세끼를 차려줘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전업주부의 노고를 모르는 바 아니기에 그동안은 엄마의 역성을 들어온 나지만 얼마 전에는 예외적으로 아빠를 두둔했다. 막바지 여름을 즐기려 서해로 당일치기 여행을 떠났다가 호되게 당한 직후였기 때문이다. 나는 수영을 가르쳐 주겠다는 친구의 지휘에 따라 파도와 맞서가며 손발을 저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흐느적흐느적 힘이 빠지더니만 돌연 눈이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곧바로 짐을 싸서 병원으로 달려갔다. 약 봉투를 손에 꼭 쥐고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오르며 생각했다. ‘동해라도 갔으면 죽을 뻔했네.’

사실 올해 들어 병원을 찾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기계가 오래되면 부품이 하나둘 고장 나듯, 인간도 40년쯤 살면 몸 여기저기에 문제가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화 속도가 늦어진 요즘이기에 자기 나이에 0.8을 곱한 것이 진짜 나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그렇다면 난 아직 서른둘밖에 되지 않은 셈인데, 게다가 술도 마시지 않고 운동도 열심히 하는데,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이란 말인가. 그러나 며칠 전 찾은 병원에서 차트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던 의사의 “어우, 동안이네!” 하는 사탕발림에 병이 씻은 듯 나은 기분이 든 걸 보면 서른둘은 무슨, 빼도 박도 못하는 마흔이 맞는가 보다.

마흔이 많지 않은 나이라는 사실은 안다. 그래서 더 걱정이 된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흔들리던 마음이 비로소 제 갈 길을 정했고, 그동안 저질러온 숱한 실수를 발판 삼아 후회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데다가 어느 때보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아진 걸 보면 내 인생은 이제부터 시작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조금만 무리했다 싶으면 온몸이 살려 달라고 아우성을 치니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가진 거라고는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장수 유전자뿐이라고 자신해 왔건만 그것이 내 발목을 잡을 줄이야. 자칫 잘못했다가는 ‘유병장수’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신이 그만 아득해졌다.

아무래도 내 몸 어딘가에 큰 병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간밤에 잠을 설치긴 했지만 고작 그 이유만으로 눈이 부어오를 순 없으니까. 며칠 만에 또다시 병원을 찾은 나는 진료를 기다리며 화면 속 광고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생애전환기’라는 단어가 팅팅 부은 눈가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 아래로는 ‘신체의 상태가 다른 방향으로 바뀌어 가기에 생애를 위한 관리가 필요한 시기로 만 40세와 만 66세를 기준으로 삼는다’는 설명이 쓰여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나는 일생일대의 전환기에 놓인 상태구나. 그것도 모르고 전과 같이 살아가니 내 몸이 신호를 보내는 것이구나. 예전 같지 않은 몸을 원망하는 대신 달라진 신체에 적응하고 그것에 맞게 생활의 전반을 돌봐야겠구나. 그렇구나.

어찌하면 이 전환기를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을지 궁리하던 나의 머릿속에 아빠의 얼굴이 스쳤다. 아빠의 엄살은 날로 쇠약해지는 당신의 몸에 꼭 맞춘 관리 방법일지도 모른다. 생애전환기를 두 번이나 맞이한 아버지의 연륜에서 우러나온 지혜로운 대처에 경탄이 절로 나왔다. 때마침 내 이름이 호명됐다. 진료실에 들어선 나는 그동안의 병력과 현재의 증상을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의사는 내 눈을 가만히 살피더니만 뭐 이런 걸 가지고 병원에 다 왔냐는 듯 입을 삐쭉 내밀었다. “흠,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은데….” 그런 의사의 말에 나 역시 입을 삐쭉 내밀었다. 질병 예방에 엄살보다 더 탁월한 방법은 없다는 걸 선생님은 아직 모르시는 모양이다.

이주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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