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포르투갈 ’해상제국‘의 실제 모습 [김기협의 남양사(南洋史) <27>]

김기협 2024. 9. 14.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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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 역사학자

몇 해 전 〈오랑캐의 역사〉(2022) 작업을 하면서 유목세계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 키워드가 “그림자 제국”이었다. 한나라 초기 흉노제국의 성격을 생각하며 떠올린 말인데, 후에 알고 보니 토머스 바필드가 2001년 논문에서 쓴 말이었다. (수전 앨코크 등 엮음, 〈고고학과 역사학으로 본 제국 Empires: Perspectives from Archaeology and History〉 소수 “The Shadow Empires: imperial state formation along the Chinese-Nomad frontier”) 그의 1989년 책 〈위태로운 변경 The Perilous Frontier〉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개념이다.

‘제국’이라면 방대한 자원을 갖춘 조직이다. 흉노의 인구와 생산력은 한나라와 비교가 되지 않는 미약한 수준이었다. 작은 인구와 생산력으로 거대한 조직을 만들어 한나라와 맞선 것은 진-한 제국의 출현 때문에 초원에 일어난 변화라고 보는 것이다.

바필드는 2001년 논문에서 흉노와 같은 ‘반사형 제국(mirror empires)’ 외에 몇 개 유형의 그림자 제국을 제시했다. ‘그림자 제국’을 하나의 일반적 현상으로 확장해 보려는 뜻인데, 그리 석연치 않았다. 이 논문을 확충한 〈그림자 제국 Shadow Empires〉(2023)이란 책이 최근 나와서 얼마나 석연해졌는지 살펴보고 있다. 남양사와 관련해서 특히 ‘해상-교역 제국(maritime trade empires)’ 유형에 관심이 간다.

Empires: Perspectives from Archaeology and History ed. by Susan E. Alcock, Terence N. D'Altroy, et al. (2001)


Thomas Barfield, Shadow Empires: An Alternative Imperial History (2023)

해상제국은 모두 ‘그림자 제국’이었나?


‘그림자 제국’ 개념을 일반화하려는 바필드의 제안은 이 책을 읽어도 수긍되지 않는다. 그가 ‘그림자 제국’을 ‘본격 제국(primary empires)’과 구분하는 기준은 ‘자족성(autarchy)’이다. 충분한 자체 생산력을 가진 본격 제국과 달리 그림자 제국은 자원을 탈취할 (안정된) 대상이 존재하는 조건에서만 성립된다는 것이다.

해상제국을 다룬 이 책 제2장에는 고대 아테네와 근대 초기의 영국동인도회사가 예시되어 있다. 아테네는 페르시아제국의 위협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에게해의 패권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반사형 제국’으로 볼 수도 있겠다. 부족 단위로 분열되어 있던 유목세력을 진-한 제국의 위협 앞에서 단기간에 규합한 것과 비슷한 현상이었다.

김영옥 기자


해상세력의 일반적 속성을 더 잘 보여주는 것이 영국동인도회사(EIC)의 사례다. 작은 자원을 갖고 (인력 포함) 특화된 기술로 (조선술-항해술 포함) 교역 활동의 주도권을 통해 근거를 확보하는 해상세력의 특성은 시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널리 일어난 현상이다.

바필드는 모든 해상세력이 그림자 제국의 성향을 가진다고 주장하려는 것 같다. 1-2차 산업보다 3차 산업에 근거를 두기 때문에 자족성을 가진 본격 제국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대륙의 관점에서 나온 편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교역이 원래부터 큰 비중을 가진 해양 지역의 지정학적 조건 위에서는 ‘자족성’의 기준을 달리 봐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림자 제국’ 개념은 유목민의 ‘반사형 제국’에만 유효한 것 같다. ‘해상-교역 제국’ 외에 바필드가 제시하는 ‘포식형 제국(vulture empires)’, ‘추억의 제국(empires of nostalgia)' 등 다른 유형들도 ’그림자 제국‘ 개념의 확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앞서 이 문제를 살핀 적이 있는데(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46998), 이제 새로 나온 책을 보며 원래의 생각을 확인한다. (당시의 착오 하나. 바필드의 〈위태로운 변경〉에 ’그림자 제국‘ 개념이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2001년 논문에서 처음 내놓은 것이었다.)


스리비자야 제국의 유적이 빈약한 이유


바필드는 〈그림자 제국〉에서 고대 아테네와 카르타고, 중세의 베네치아, 그리고 근대 초기 포르투갈, 영국, 네덜란드 등의 해상활동을 해상-교역 제국의 예로 거론했다. 유럽인의 역사에 한정되어 있다는 데 시야의 한계가 있다.

해상세력의 초기 발전에 유리한 지정학적 조건을 가진 곳으로 동부 지중해와 동남아 지역을 꼽을 수 있다. 바필드는 동부 지중해의 아테네, 카르타고와 베네치아를 거론했다. 동남아는 유럽인이 도착한 16세기 이후의 상황만 제시했다.

유럽인 도착 이전 동남아의 대표적 해상세력으로 스리비자야가 있었다. 스리비자야의 존재는 1918년 프랑스 학자 조르주 시데스가 중국의 기록과 현지의 금석문을 대조하여 밝혔는데, 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모습이 분명하지 않다. 중국 기록에 나타나는 분명한 존재감이 현지의 유물-유적으로 뒷받침되지 않기 때문이다.

조르주 시데스(1886-1969)는 식민지시대를 대표한 동남아 연구자로서 남양에 대한 인도문화의 영향을 밝히는 데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7-11세기 기간에 번영했던 것으로 전해지는 스리비자야가 9세기 자바의 보로부두르에 비길 만한 유적을 전혀 남기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농업 중심의 나가라와 교역 중심의 네게리 사이의 차이 외에는 실마리를 찾을 수 없다. 농업세력이 ’권력‘을 통해 구체적 조직을 쌓아 올린 반면 교역세력은 ’영향력‘을 통해 느슨한 관계를 빚어낸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잠비 지역의 사원 군락 정도가 스리비자야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이다.
보로부두르 유적.

포르투갈인의 활동은 ’정복‘보다 ’적응‘


바필드의 논문을 보려고 구한 〈고고학과 역사학으로 본 제국〉에서 다른 논문 하나를 건졌다. 산자이 수브라마냠의 “물 위에 쓴 글씨: 포르투갈 인도총독부의 구조와 동력 Written on water: designs and dynamics in the Portuguese Estado da India”. 포르투갈인의 16-17세기 인도양 활동을 개관한 논문이다.

1498년 인도양에 처음 들어온 후 포르투갈인은 눈부신 정복자의 모습을 보였다. 소팔라, 고아, 호르무즈, 말라카 등 요충지를 십여 년 사이에 점령했을 뿐 아니라 엽기적으로 잔인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수브라마냠의 논문을 읽으면 이 공격성이 타고난 본성보다 처해 있던 상황의 절박함에서 나온 측면을 이해할 수 있다.

초기 정복이 일단락되고 고아에 총독부가 설치되는 1516년 시점에 인도양에서 활동하고 있던 포르투갈인은 약 4천 명으로 추정된다.
1540년경까지 겨우 6-7천 명으로 늘어났다. 십여 개 기지의 군인과 행정요원, 선교사와 상인을 합친 숫자가 그랬다. 인도양 전역에서 운용되고 있던 포르투갈 배가 십여 척에 불과했다는 1525년경의 자료도 소개되어 있다.

포르투갈인의 “항로 독점”은 현실과 동떨어진 구호에 불과했을 것으로 수브라마냠은 본다. 인도양 일대의 기존 질서를 뒤바꾸기보다는 그에 적응하면서 부분적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보는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총독부의 공적 활동 외에 용병 등 개인적 활동의 비중이 늘어나는 것도 그런 관점에서 쉽게 이해된다.

16세기 후반에 많은 포르투갈인이 브라질에 자리 잡은 반면 인도양 방면에는 크게 늘어나지 않았다. 17세기 들어 네덜란드의 도전에 포르투갈이 패퇴했다는 통설에 수브라마냠은 동의하지 않는다. 포르투갈인 스스로 적응에 한계를 보인 결과라는 것이다.


‘은의 배’가 아시아 항로에 가져온 변화


차우두리는 〈인도양의 교역과 문명〉(1985)에서 16세기 인도양의 포르투갈인 활동을 세 단계로 구분했다. 1515년까지가 개척기, 1560년까지 전성기, 그리고 1560년 이후의 쇠퇴기다. 쇠퇴기의 두 가지 변화를 차우두리는 지적한다. 현지인의 도전으로 항로 독점이 약화된 것과 현지 교역 참여가 많아진 것이다.

현지 교역 참여의 대표적인 예가 고아-마카오-나가사키 항로 운영이다. 일본인은 ‘구로후네(黑船)’, 포르투갈인은 ‘은의 배(nau da prata)'라 부른 이 항로의 핵심 사업은 중국과 일본 사이의 교역이었다. 명나라가 일본과의 직접 교섭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틈새를 포착한 이 사업은 16세기 후반을 통해 포르투갈인의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다.

포르투갈 배의 접안 모습을 그린 1600년경의 일본 병풍.


포르투갈인의 인도양 진입 목적은 향료 확보에 있었다. 그 목적을 위한 활동 범위는 남양까지였다. 그러나 막상 현지에서 활동을 시작하자 현지의 수요에 따라 영역을 넓히면서 중국-일본 교역에 나서게 된 것이다.
포르투갈인이 (서양인으로서는) 독점하고 있던 일본 교역에 1609년부터 네덜란드인이 끼어들었기 때문에 1639년 포르투갈인이 축출된 것을 네덜란드인의 승리로 흔히 본다. 수브라마냠은 이에 대해서도 다른 의견이다. 도쿠가와 막부의 안정 등 일본의 사정 변화에 따라 포르투갈인의 적응력이 한계에 이른 것이고, 네덜란드인은 그 틈새를 파고든 것으로 본다.

데지마(出島)는 포르투갈인의 활동을 제한하기 위해 1636년 나가사키에 만든(운하를 파서) 조그만 섬인데, (가로 120미터, 세로 75미터) 얼마 후 포르투갈인이 추방된 뒤에는 네덜란드인의 활동을 제한하는 데 쓰였다.


15세기 이전 아시아 항로에는 분졀(分節) 현상이 있었다. 남양에서 북쪽 남중국해로 다니는 배들과 서쪽 인도양으로 다니는 배들이 따로 있어서 남양 일대에서 화물과 승객을 옮겨 실었던 것이다. 고아-마카오-나가사키 노선으로 두 영역을 관통하는 항로를 확장한 것을 포르투갈인이 가져온 큰 변화의 하나로 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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