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추석 연휴에 긴장 높아진 응급실…"뺑뺑이 없게" 정부 분주
13일 오전, 서울 한양대병원의 권역응급의료센터 앞에 구급차 5대가 들어섰다. 응급실 앞 주차구역이 119·사설 구급차로 꽉 찼다. 한 구급차에서 다급히 내린 60대 여성 A씨는 응급실 벨을 누른 뒤 '수용 가능' 여부를 확인받았다. 들것에 실린 80대 여성 환자가 구급대원 도움을 받아 안으로 옮겨졌다. A씨는 "요양병원에 계시던 어머니 상태가 갑자기 나빠져 오게 됐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건국대병원 응급실(지역응급의료센터). 동료 직원이 갑자기 가슴 통증을 호소해 보호자로 왔다는 성모(58)씨는 "(진료를 봐 줄) 의사가 없어서 1시간째 기다리고 있다. 큰 병원이 이런데, 지방 병원은 어떨까 싶다"고 말했다. 경증으로 보이는 환자도 적지 않았다. 진료를 마치고 나온 40대 여성 B씨는 "복통 때문에 응급실을 찾았다"고 말했다. B씨 남편은 "의사가 한명 밖에 없어서 한참 기다렸다"고 덧붙였다.
이번 추석은 전공의 이탈에 따른 의료공백 사태가 본격화된 후 맞는 첫 명절이다. 추석 연휴 기간, 가장 긴장감이 큰 곳은 병원에 들어가는 관문이자 응급환자 최후의 보루인 '응급실'이다. 최근 전문의들의 피로누적·사직 등으로 근무자가 부족해진 데 따른 '응급실 뺑뺑이' 문제가 대두하고 있다. 긴 연휴 동안 많은 의료기관이 문을 닫으면서 경증·중증 환자가 한꺼번에 몰릴 거란 우려도 나온다. 이러한 의료공백을 해소할 계기로 주목받던 여·야·의·정 협의체 구성도 의료계 단체의 '공동 참여 거부'로 사실상 어려워졌다.
연휴를 앞둔 이 날 중앙응급의료센터 종합상황판 홈페이지엔 '전문의 1명 진료, 119 이송 전 수용 여부 확인', '일부 과목 진료 불가' 등의 안내 메시지를 올린 병원이 여럿이었다. 서울 '빅5' 병원 관계자는 "응급실 상황이 녹록지 않지만, 인력 상황상 추석 연휴에 응급의학과 전문의 당직을 늘리거나 다른 진료과 전문의를 추가로 투입하긴 쉽지 않다"고 말했다.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가 이달 9~10일 전국 53개 수련병원의 응급실 현황을 조사한 결과, 응급실 근무 의사는 지난해 914명에서 535명으로 41.5% 줄었다. 전의교협은 조사 참여 병원 중 7곳이 응급실 근무 의사가 5명 이하로, 24시간 운영이 어려워 부분 폐쇄를 고려해야 하는 수준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흔들리는 응급의료체계 유지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11~25일 2주 동안을 '추석명절 비상응급 대응주간'으로 운영한다. 이번 연휴엔 전국에서 하루 평균 7931곳(13일 기준)의 병·의원이 문을 열 예정이다. 지난 설 연휴(약 3600개)의 두 배 이상이다. 150여개 분만병원도 운영을 이어간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13일 브리핑에서 "이번 연휴 동안 전국 409개 응급실 중 2곳을 제외한 407개 응급실은 매일 24시간 운영된다"고 밝혔다.
정부는 연휴 전후로 건강보험 수가도 한시적으로 인상한다. 권역응급의료센터의 전문의 진찰료를 평상시의 3.5배로 올리고, 응급실 진료 후 수술·마취 등에 대한 수가도 인상하는 식이다. 인력 이탈로 어려움을 겪는 응급의료센터엔 신규 채용 인건비를 지원하고, 군의관·의사·진료지원(PA)간호사 등 대체 인력도 최대한 투입하기로 했다.
국민에겐 아플 경우 무조건 큰 병원이나 응급실에 가기보단 '중증도'를 판단해 의료기관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12일 "중증 응급 환자는 권역·거점지역센터에서 우선 수용하고, 경증·비응급 환자는 중소병원 응급실이나 가까운 당직 병·의원에서 치료해 응급실 쏠림 현상을 최소화하겠다"고 밝혔다.
경증·비응급 환자가 대형병원 응급실을 이용할 경우, 진료비 본인 부담률을 50~60%에서 90%로 인상하는 제도도 13일부터 시행했다. 이들 환자가 권역응급의료센터를 방문하면 기존(13만원)보다 9만원 비싼 평균 22만원을 부담하게 된다.
실제로 명절 연휴엔 경증 환자 중심으로 응급실 방문이 잦아진다. 복지부에 따르면 2022년 추석 연휴에 권역·지역응급의료센터를 찾은 환자는 평상시 평일의 두 배 가까이로 늘었다. 이들 환자는 손상·염좌·감기 같은 경증 질환이 상당수였다.
각 지자체도 분주해졌다. 지자체장 책임하에 '비상의료관리상황반'이 운영되면서 지역별 응급의료체계를 챙기게 된다. 서울시는 추석 연휴 의료기관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16~18일 문 여는 병·의원, 약국에는 하루 최대 100만원의 운영비를 지원한다고 밝혔다.
현장에선 묵묵히 환자를 챙기는 의료진이 많다. 서울 구로·성북에 있는 소아청소년과 전문병원인 우리아이들병원은 추석 연휴에도 진료를 계속한다. 예전 명절에도 문을 열었지만, 이번엔 의료공백 상황을 고려해 진료실 운영을 더 늘리기로 했다. 정성관 우리아이들의료재단 이사장은 "다른 아동병원, 달빛어린이병원들도 연휴에 문 열고 환자를 챙기는 곳이 많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대형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밤·휴일·명절 없이 일하다 보니 체력적 한계가 온다. 언제까지 이렇게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면서도 "늘 그랬듯 이번 명절에도 응급실을 지킬 거다. 살릴 수 있는 환자를 못 살리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추석이란 큰 고비를 넘겨도 의료공백이 더 길어지면 또 다른 고비가 올 거란 우려는 여전하다. 이경원 용인세브란스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대한응급의학회 공보이사)는 "추석 때 큰 문제 없이 넘어간다 해도, 그 이후가 더 문제"라면서 "오랜 격무로 소진된 대형병원 응급의학과 전문의들이 근무 여건이 나은 곳으로 이동하는 양상이 뚜렷하다. 연휴 이후 장기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제안한 여·야·의·정 협의체 구성도 멀어지는 모양새다. 이날 대한의사협회(의협)·대한의학회·전의교협 등을 비롯한 8개 의료계 단체는 협의체 참여를 거부하는 내용의 공동 입장문을 발표했다. 최안나 의협 대변인은 "정부가 잘못된 정책을 인정하지 않으면 (의료공백) 사태는 해결되지 않는다"면서 "정부의 태도 변화가 없는 현시점에 협의체 참여는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의료계가 내년도 의대 증원 백지화 등의 요구를 거두지 않으면서, 협의체 구성은 추석 이후에도 쉽지 않을 전망이다.
정종훈ㆍ남수현 기자 sakeh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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