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첫 장면, 깊어진 연기… 근데 나는 왜 이 영화가 아쉬울까

김성호 2024. 9. 13.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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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831] <비틀쥬스 비틀쥬스>

[김성호 기자]

무려 36년 만이다. <비틀쥬스>로부터 <비틀쥬스 비틀쥬스>가 나오기까지 그토록 긴 시간이 필요했다. 삼십대 청춘을 구가하던 팀 버튼과 대니 엘프먼, 또 마이클 키튼이 예순을 훌쩍 넘긴 할배가 됐다. 십대 후반 압도적인 미모로 할리우드를 반하게 한 위노나 라이더는 첫 등장부터 그녀의 지난시절을 기억하는 팬들에게 충격을 던진다. 시간은 모든 것을 쇠락하게 하니, 한때는 찬란했던 무엇도 더는 그렇지 못하단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팀 버튼이 본래 그런 감독이기도 하지만, <비틀쥬스>는 유독 특정한 팬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 작품이다. 적잖이 기괴하고 낯선 연출 탓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도 적지 않지만, 그 스타일을 즐기는 이들에겐 어디서도 맛보기 어려운 자극과 인상을 남기는 탓이다. 할리우드에 제 이름을 알려가던 재기 넘치는 창작자의 초기작으로, 다른 어느 영화보다도 그의 스타일이 잘 녹아있는 작품이란 평가를 받는다.

기괴한 분위기의 배경구성과 독특한 색감, 이상야릇한 캐릭터들까지. 모두가 충만한 상상력의 결과물이라 할 만하다. 팀 버튼의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 이들 가운데서도 이 영화에 호감을 표하는 이가 상당하다. 그만큼 독특한 매력을 가졌단 뜻이겠다. 그 기발한 발상과 장난기어린 에피소드라니. <비틀쥬스>가 아니라면 어디서 '비틀쥬스'적 캐릭터를 만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시간이 이들에게 미친 영향
 영화 <비틀쥬스 비틀쥬스> 스틸컷
ⓒ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비틀쥬스 비틀쥬스>는 시간이 창작자, 나아가 예술가에게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한다. 이 영화의 가장 강렬한 순간은 오프닝이다. 팀 버튼에게 있어 영혼의 단짝이라 해도 좋을 영화음악가 대니 엘프먼의 스코어가 관객을 단박에 추억과 감격으로 몰고 간다. 시간이 한 분야의 대가에게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지를, 그 스타일과는 별개로 제가 과거보다 얼마나 기술적으로 나아진 실력을 갖추었는지를 엘프먼의 스코어가 여실히 증명한다.

대니 엘프먼이 누구인가. 쥬세페 토르나토레와 세르지오 레오네에게 엔니오 모리꼬네가, 스티븐 스필버그에게 존 윌리엄스가 있다면 팀 버튼의 짝지가 바로 대니 엘프먼이다. 버튼 외에도 샘 레이미, 구스 반 산트, 데이비드 O. 러셀 등 이름난 감독들과 작품을 같이 했지만 엘프먼과 버튼을 함께 떠올리지 않는 영화팬이 없을 정도다. 특유의 어두운 색채와 몽환적인 분위기가 버튼의 영화세계와 꼭 맞아떨어진 탓이다. 서로가 서로와 꼭 맞는 작품세계를 가졌단 점에서 그들이 일찌감치 만나 같은 시대를 함께 헤쳐왔다는 건 축복이라 해도 좋겠다.

엘프먼의 음악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팀 버튼의 영상은 과연 대단하다 해도 좋겠다. 단박에 1988년 원작의 정취를 살려내는 동시에, 그때는 갖지 못했고 오늘은 가진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시킨다. 영상의 세련됨은 전과 비할 수 없다. 재치로 눙치고 넘어갔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제가 할리우드의 대가가 됐음을, 충분한 제작비를 바탕으로 첨단 기술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세련된 감독이란 사실을 알린다.

그로부터 영화는 그저 <비틀쥬스 비틀쥬스>의 분위기를 내보이는 첫 장면, 매끄러운 카메라워킹과 압도적이라 할 만한 음향만으로 관객의 관심을 빼어잡는다. 36년 만에 나온 이야기가 어떤 것인지를, '비틀쥬스를 세 번 외치면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것', 또 '산자가 굳이 보려하지 않았던 죽은 자의 세계가 가까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전하기 시작한다.

그로부터 시작된 첫 장면은 여러모로 인상적이다. 화면 가득 채워지는 위노나 라이더의 달라진 외모는, 다듬어지지 않은 표정과 몸짓, 발화에도 불구하고 존재 자체를 매혹적으로 느끼게 했던 십대 시절의 배우가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는단 걸 확인시킨다. 감독은 다른 누구도 아닌 위노나 라이더에게 영화의 첫 인상을 책임지도록 하는데, 그건 그대로 원작을 기억하는 팬들에게 지난 시간을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다.

완숙해진 버튼이며 엘프만과 달리 결국 외모며 분위기가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배우, 즉 위노나와 키튼은 지난 36년의 세월이 제게 남긴 것을 정면에서 대응해야 하는 입장에 처한다. <비틀쥬스>가 <비틀쥬스 비틀쥬스>가 되기까지, 그대로 캐스팅된 배우의 쉽지 않은 책임을 이들은 맡아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한때는 파격적이고 매혹적이었던 이들이 이제는 완숙한 배우가 돼 전체 이야기와의 균형이며 경험 적은 배우와의 조화를 생각하는 모습이 이채롭다.

더없이 참신한 원작에서 평이한 가족드라마로

귀신을 보는 강렬한 캐릭터를 앞세워 전체 극을 지배하던 캐릭터가 이제는 제 딸을 지키려고 동분서주하는 전형적인 아줌마가 되고, 또 독보적 존재감을 과시하던 저승의 괴짜요괴는 전보다 한층 줄어든 비중에도 감초역할을 소화한다. <비틀쥬스 비틀쥬스>는 그렇게 옛것과 지금 것의 차이를 긍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구성이 새로운 영화는 아니다. 원작이 심령현상의 일종인 폴터가이스트(Poltergeist), 유령에 의해 물건이 움직이고 소음이 발생하는 현상을 소재 삼아 어느 집의 죽은 주인들이 새로 이사온 가족을 쫓아내려 하는 이야기였다면, 신작은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모험 가운데 모녀의 갈등이 해소된다는 판타지 속 가족드라마의 형식을 취한다. 요컨대 공포 가운데 판타지와 코미디를 다채롭게 취한 전작에서 기본적인 가족드라마로 회귀한 꼴이다.

주인공은 영매로 제법 이름을 날리게 된 리디아(위노나 라이더 분)와 그녀의 사춘기 딸 아스트리드(제나 오르테가 분)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마음을 잡지 못하는 아스트리드에게 그나마 할아버지 찰스는 기댈 언덕이다. 유령을 본다는 엄마와 괴짜 할머니가 그녀에겐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할아버지가 사고로 사망하며 온 가족이 시골로 이사를 가게 되니 아스트리드는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영화는 우연한 계기로 저승으로 끌려들어간 아스트리드를 구하는 리디아의 이야기, 또 한편으로 저승에서 어마어마한 사고를 치고 다니는 악령이자 비틀쥬스의 전처 델로레스(모니카 벨루치 분)가 예기치 못한 활약을 거듭한다. 그리스·로마 신화 속 하데스에게 납치된 페르세포네의 이야기, 혹은 죽은 아내 에우뤼디케를 찾아 저승까지 가 그녀를 구출하려 든 오르페우스의 전설을 떠올리게 하는 줄거리 가운데 저승에 끌려간 아스트리드를 구출하려는 리디아의 분투, 또 전작과 마찬가지로 그녀를 탐해 도움을 주는 비틀쥬스의 이야기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반복된다.

새로운 시도 대신 성공 방정식을 답습하는
 영화 <비틀쥬스 비틀쥬스> 스틸컷
ⓒ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다시 말해 <비틀쥬스 비틀쥬스>는 구조적으로 새로운 영화는 아니다. 흔하고 전형적인 줄거리 가운데 옛 원작의 정취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 승부수다. 그 젊음과 재기가 시든 기색이 역력한 위노나 라이더와 마이클 키튼이란 두 배우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에 갖지 못했던 역량을 꺼내는 광경이 놀랍다. 한때는 오로지 화사한 매력이 전부였던 전형적인 스타들이 어느새 삶의 굴곡진 지점을 건너 베테랑 배우가 됐단 사실이 신선하다.

한편으로 <비틀쥬스 비틀쥬스>가 가진 아쉬움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할리우드가 지난 십여 년 간 시나리오 기근을 겪어왔단 건 유명한 이야기다. 오리지널 시나리오라 부를 수 있는 작품이 뚜렷하게 나오지 않아 재탕에 다시 재탕을 찍는 경우가 수두룩했다. 리메이크를 넘어 리부트며 스핀오프, 말만 조금씩 달리한 그렇고 그런 영화들이 쏟아진 배경이 바로 이것이다. 할리우드의 큰어른이라 해도 좋을 마틴 스콜세이지가 지난 십수년을 지배한 마블 영화에 대해 혹평을 내놓은 것도, 그렇다고 극장가에서 이보다 더 상품성 있는 작품을 내걸지 못한 것도 모두 이와 관련이 있다.

올 한 해만 해도 그렇다. <트위스터>를 원작으로 한 <트위스터스>, 또 <에이리언> 오리지널 시리즈 1,2편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에이리언: 로물루스>는 상당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실망감을 남겼다. 두 작품 모두 새로움을 낳는 대신 기존 작품의 성취를 최대한 복원하는 데 집중한 기색이 역력하다. 특히 정이삭의 <트위스터스>는 기술적 진전을 제외하곤 설정과 전개, 서사에 있어 전작을 모방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비틀쥬스 비틀쥬스> 또한 이야기의 구성에서 <비틀쥬스>보다 진전된 구조라 보기는 어렵지 않은가. 옛 신화의 설정과 가족드라마의 갈등과 해소, 전작에서 이미 이뤄놓은 캐릭터의 조합으로 오늘의 관객에게 소구력을 발휘하길 기대하는 건 안이한 선택이 아닌가.

이 영화의 반가움과는 별개로 아쉬움을 지적할 밖에 없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위노나 라이더와 마이클 키튼, 전과 전혀 다른 매력을 발휘하는 이들 배우의 변신만으로 영화 전체를 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젊음의 매혹과 달리 나이든 이의 원숙함이란 홀로 빛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 <비틀쥬스 비틀쥬스> 포스터
ⓒ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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