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왜, '수장 학살'을 자행했나?
[완도신문 김종수]
수장이라 함은 물속에 시신을 집어넣어 장사지냄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을 얘기할 때는 단순히 장례 행위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수장 학살의 의미로 쓰인 때는 1950년대. 국가 폭력에 의해 무참히 학살돼 바다에 유기된 행위의 의미로 사용된 용어다.
그럼 국가는 왜 많은 민간인을 수장이란 골치 아픈 방법으로 학살을 자행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수장 학살이 증거 인멸에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는 사실 때문에 선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장 학살은 한국전쟁 전후 한 시기 보도연맹원을 대상으로 발생했다. 제주항은 집중적으로 이뤄졌다는 증언이 있다. 이와 달리 전국 여러 해안 지방, 특히 남해안 지방에서 한국전쟁 발발 이후 집중적으로 행해졌으며, 그중 목포에서 부산까지 많은 곳에서 수장 학살이 자행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제3권 - 민간인 집단 희생 사건'에서 전국 수장 학살 사건을 조사해 다음 지역에서 이뤄졌다고 지적하고 있다(타 지역 생략). 충청·전라지역: 완도, 해남, 진도, 여수, 목포 등 남해안 지역의 보도연맹원들은 두 차례에 거쳐 바다에 수장되거나 살해되었는데, 인민군 진압이 어려운 섬 지역 보도연맹원들은 8월까지 사살되거나 수장됐다.
수장 학살 가능지로 지적된 여러 곳 중 우리의 눈길을 끄는 곳은 목포, 마산, 부산 형무소 세 곳의 보도연맹원 예비 검속자 학살 사건이다. 왜냐하면 이 지역의 수장 학살의 경우 그 사체가 먼바다로 나갔다면 대마난류를 타고 제주도와 마찬가지로 대마도로 표류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수장 학살은 사체를 먼바다로 나가 유기하는 것이 원칙이다. 왜냐하면 가까운 바다에 버렸을 경우 조류를 타고 다시 근처 육지로 떠오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당시 학살자들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 검속자들을 배에 태워 학살한 후 먼바다로 나가 시체를 버렸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악행은 영원히 덮을 수 없었다. 제주와 남해안 먼바다에 유기한 사체는 대마 난류를 타고 대마도나 그 너머까지도 흘러갔고, 이러한 사실은 당시 대마도 현지인들과 언론을 통해 우리에게도 결국 알려져 큰 충격을 줬다.
전쟁 직후 수장 학살 사체뿐만 아니라 그 외 해상 표류 사체들이 근해 어로 작업을 나갔던 대마도 주민에 의해 거둬졌으며, 여러 사찰이나 시신을 거둔 갯바위 등에 무명 위령비가 세워져 있어 지금도 그 흔적을 대마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완도의 수장 학살
완도의 수장 학살은 국민 보도연맹원 학살, 나주 경찰 부대 사건, 적대 세력에 의한 학살 등 크게 세 사건으로 나타난다.
완도의 예비 검속은 1950년 7월 초, 중순에 있었다. 완도 각지에서 예비 검속된 주민들은 완도 경찰서로 이송된 뒤 7월 17일 이전에 장영호에 실려 목포로 보내진 직후 목포 인근 앞바다에서 수장 학살됐다. 학살 위치는 목포시에서 가까운 큰 바다 인근 해상이 아닐까 추정된다. 쇠몽둥이로 사람들의 발을 묶었기 때문에 살아남기 지극히 어려웠을 것이다. 예비 검속이라 함은 혐의자를 미리 잡아 가두는 일을 뜻한다.
완도 경찰은 각지서나 창고 등에 구금했던 예비 검속자들을 관내 바다에 넣어 학살했으며, 경찰서 소속 경비정을 동원해 완도군 관내 항구에서 예비 검속자들을 태웠다. 당시 살아남은 이야기를 그의 사촌이 기억하며 얘기한다.
"완도 경찰서에 구금 중 밤에 손이 포박된 채 배에 실려 나왔는데 총을 쏴서 바다로 떨어졌다. 총은 맞지 않았고 묶인 손이 풀려서 배 뒤편 후미를 붙잡고 완도 항으로 돌아왔다. 밤이고 낯선 곳이라 정확치는 않지만 완도읍 개머리 앞바다로 추정된다."
한편, 완도는 이른바 나주 경찰 부대가 들어오면서 다시 한번 주민들이 희생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나주 경찰 부대는 나주 경찰들 위주로 구성된 부대로, 200여 명 정도의 규모이며 남으로 후퇴하면서 이동하는 곳마다 많은 주민 학살을 자행했으며, 소속을 알 수 없는 복장과 말투 또한 북한말을 사용했다고 한다. 아무것도 모른 채 북한군이 내려오고 있다는 정보를 접한 주민들은 그들이 영락없는 북한군으로 보였을 것이다.
완도군민은 이들을 북한군으로 착각하고 완도중학교에 모여 북한군 환영 대회를 준비했다. 모여 있는 군중들을 사살하고 일부는 연행, 완도서에 구금했다. 완도에 머무는 동안 여러 차례 수장 학살을 벌였다. 또한 청산도 청항에 북한군으로 위장한 주민들을 사살하고 5명을 바다로 끌고 가 수장 학살했다.
다른 주민들은 개머리 앞바다에 던져졌다. 나주 부대는 완도에서 북한군에게 밀려나기 직전까지도 학살을 멈추지 않았다.
9월 14일부터 완도읍에 주둔한 북한군은 완도 우익 인사들을 완도 경찰서 유치장에 감금하고, 구금된 주민 40여 명을 4명씩 짝지어 전기줄로 손을 묶었다. 군내리 항으로 끌고 가 준비된 배에 한 척당 8명씩 태웠다. 배에는 돌이 이미 준비돼 있었으며, 주민을 묶은 줄에 돌을 3개씩 매달았다.
이내 배들이 주도 앞바다에 멈추자 차례차례 밀어 넣었다. 가라앉지 않고 떠오르는 주민에겐 북한군의 총알이 쏟아졌다. 북한군이 철수하기 전, 우익 인사들을 주도 앞바다에서 학살했다. 학살 현장에는 10여 명 정도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천운의 생존자들은 포박이 풀리거나 총탄이 비껴가 살아남은, 이 또한 기적 같은 운명이 아닐 수 없다.
이른바 적대 세력에 의해 희생된 억울한 영혼은 약 93명이며, 그중 수장된 것으로 추정된 희생자는 모두 75명이다.
우리는 무심하게도 주도 앞바다나 개머리 앞바다를 지나간다. 통곡의 바다... 잊혀진 역사는 또한 거짓으로 덮을 수 없는 진실. 우리들의 생명의 삶터, 그날의 바다.
오늘을 살아가는 후손들은 그날의 역사를 진정 잊지 말아야 할 것이며, 영원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종수씨는 사) 완도평화재단 이사장입니다.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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