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유국 1위 만든 프래킹 기술, 美 대선 이슈로 부상[글로벌 현장]
미국 대선의 핵심 의제 중 하나로 셰일오일·가스 개발에 사용되는 ‘프래킹(수압파쇄법)’이 등장했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종전 프래킹 반대 입장에서 찬성으로 돌아서면서 공화당은 해리스의 ‘변심’을 비판하고 있다. 기후변화 대응을 강조하는 해리스 부통령도 프래킹이 환경파괴와 화석연료 사용 확대 등 기존 정책과 상충되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당장 대선 승리를 위해 비판을 감수하려는 분위기다.
해리스 “프래킹 금지하지 않을 것”
논란이 된 발언은 지난 8월 29일 진행된 해리스 부통령의 CNN 인터뷰에서 나왔다. 해리스 부통령은 2020년 민주당 대선 경선에 출마했을 때 프래킹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조 바이든 대통령의 러닝메이트가 된 이후부터 프래킹을 금지하지 않겠다는 바이든 대통령의 입장에 보조를 맞췄다. 프래킹은 암반에 액체를 고압으로 주입해 균열을 일으켜 가스를 분리해내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날 인터뷰에서 그는 “프래킹을 금지하지 않겠다”면서도 “내 가치관은 변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기후위기를 실존하는 위협으로 거론하면서도 프래킹 금지를 하지는 않겠다는 묘한 발언은 표를 의식한 것이다. 프래킹 금지를 선언했다가는 펜실베이니아와 같은 주요 경합주를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넘길 것이라는 위기감이 그를 타협하게 만들었다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프래킹을 활용한 셰일가스 추출은 펜실베이니아주의 주요 수입원이다. 펜실베이니아주의 선거인단은 19명으로 이번 대선 승부를 가를 7대 경합주 가운데 가장 많다. FTI컨설팅이 가스산업계 의뢰로 시행한 조사에 따르면 2022년 펜실베이니아 토지 소유주 약 20만 명이 자기 토지에서 가스정을 운영하게 한 대가로 총 60억 달러 이상의 사용료를 받았다. 또 2022년에 약 12만 명이 프래킹과 관련된 일자리를 가졌는데 평균 연봉이 9만7000달러를 넘었다. 미국 내 대부분의 셰일오일·가스는 텍사스, 뉴멕시코, 멕시코 만 등에서 생산된다.
유가 높아야 살아나는 산업
‘산유국=중동’이라는 공식은 오래전에 깨졌다. 현재 세계 최대 산유국은 미국이다. 공식적으로 세계 최대 산유국이 된 지 2018년부터 벌써 7년째다. 지난해 석유(원유+천연가스 등 석유 전반) 생산량은 러시아(세계 생산량의 11%)와 사우디(11%)를 합쳐야 미국(22%)과 비슷한 수준이다. 미국은 석유(petroleum)와 천연가스를 일 2000만 배럴 이상, 원유(crude oil)는 일 1300만 배럴 이상 뽑아내고 있다.
미국이 세계 최대 산유국이 된 비결이 바로 프래킹이다. 셰일 퇴적층에 들어 있는 화석연료를 강제로 뽑아서 쓰는 것이다. 석유가 그 안에 있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생산비가 상대적으로 높아 본격적인 생산이 시작된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2010년대 들어 프래킹 기술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고 유가가 상승하면서 빛을 보게 됐다.
땅 파서 석유가 펑펑 나오면 좋을 듯 하지만 그동안 미국 셰일오일과 가스 생산업체들의 사정은 그리 편치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생산단가가 높아서다. 셰일이 돈이 되려면 유가가 높아야 한다. 최근에는 생산단가가 배럴당 30달러 이하로 떨어진 유전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평균적으로는 배럴당 50달러 안팎은 되어야 한다는 게 통념이다. 향후 기술개발이 많이 되면 좀 더 떨어질 순 있지만 중동 지역의 생산단가는 배럴당 10달러 이하 수준인 경우가 많은 것과 비교하면 차이가 크다.
2010년대 들어서 셰일 채굴산업은 대규모 투자가 몰리면서 공급과잉이 벌어졌다. 특히 유가가 급락한 기간에 셰일오일 및 가스 생산업체들은 큰 타격을 입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유가가 배럴당 20달러대로 떨어진 2020년 무렵에는 비관론이 극에 달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20년까지 업계 전체가 ‘태운’ 돈은 총 3400억 달러에 달했다. 수익을 내지 못하고 투자만 한 돈을 뜻한다. 유가 상승을 기대하고 꾸준히 투자해 온 기업들은 잠깐 반등했다가도 떨어지기를 거듭하는 유가 탓에 현금이 말라 사업을 접어야 했다. 2015~2020년 사이에 지급불능으로 법정관리를 신청한 셰일오일·가스 회사는 총 230개에 달한다.
일단 파기 시작하면 계속 빨대를 꽂을 수가 없고 주변 압력이 내려가면 생산성이 급격히 저하되는 것도 문제다. 돈 많이 들여서 팠는데 생산량이 줄면 새로운 유정을 또 파야 한다.
환경파괴 이슈도 엄청나다. 고압의 물과 화학약품을 섞어서 암반을 부수고 갇혀 있는 화석연료를 꺼낼 때 사용되는 물의 양도 어마어마하지만 이 과정에서 주변 지하수 등의 오염 문제가 심각하다. 지하수 전반이 오염되면 그 위에서 자라는 농작물이나 생태계도 모두 영향을 받는다. 주변 주민들의 건강을 해친다는 보도도 잇따르고 있다. 싱크홀이나 지진을 발생시킬 가능성도 적지 않다.
프래킹을 허용하는 미국, 영국과 달리 독일, 프랑스, 스페인, 호주 등은 프래킹을 아예 금지하고 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등은 일부 지역에서만 금지 상태다.
바이든 정부선 ‘찬밥 신세’였지만
2020년의 이런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당선된 바이든 대통령은 프래킹에 반대해 왔다. 청정에너지로의 전환을 주장하고 있는 만큼 화석연료 생산을 늘리는 데 부정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환경파괴 이슈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바이든 대통령이 프래킹을 금지하려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가 내놓은 정책은 프래킹 자체를 금지한다기보다는 연방정부가 소유한 공공용지에서 새로운 채굴 허가를 내주지 말자는 것이었다. 비슷한 말이지만 민간 소유의 땅에서 프래킹이 이뤄지는 것을 막으려 하진 않았단 얘기다. CNN 등의 팩트체크에 따르면 그는 ‘금지(ban)’를 명시적으로 주장한 적은 없으나 프래킹에 ‘반대’한 것은 맞다.
금지하고 싶다고 해서 금지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프래킹을 금지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의지만으로는 부족하고 상·하원 의회에서 관련법이 통과되어야 한다. 텍사스주 등 셰일 채굴산업이 이뤄지고 있는 지역 의원들과 공화당의 반대를 뚫기가 현실적으로 힘들다.
결과적으로 바이든 정부에서 프래킹은 금지된 적이 없다. 청정에너지로의 전환, 전기차 보조금 지급 등을 내세우는 분위기 속에서 그리 환영받지 못했을 뿐이다.
반면 화석에너지원의 적극적 개발을 주장해온 트럼프 전 대통령은 줄곧 프래킹 찬성론자였다. 석유를 더 많이 캐서 에너지 비용을 낮추겠다는 게 그의 핵심 공약이다. 기후위기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그는 ‘석유를 많이, 더 많이 파자(drill, baby, drill)’는 공화당의 오랜 슬로건을 내세우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펜실베이니아주 유세에서 프래킹 반대에서 찬성으로 돌아선 해리스 부통령이 언젠가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모자를 쓰게 될 것이라고 조롱했다.
美 에너지 안보의 핵심 카드
차기 정부가 누가 되든간에 산유국으로서의 미국은 몇 가지 딜레마를 갖고 있다. 첫째는 기후위기 대응이냐 물가 대응이냐의 딜레마다. 장기적으로는 기후위기 대응이 필요하지만 고물가 고통이 워낙 크다 보니 ‘석유를 캐서 싼 에너지를 쓰자’는 트럼프의 대책이 솔깃하게 들릴 수 있다.
둘째는 셰일오일과 가스 생산을 통해 견제해 온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안보 문제다. 셰일오일과 가스가 본격 생산된 2010년대 들어 유가는 예전처럼 배럴당 100달러 이상으로 쉽게 치솟지 못하고 있다. 유가가 오르면 자동으로 셰일 생산이 늘어날 것으로 시장이 기대하고, 실제로 어느 정도는 그렇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이 스스로 유가에 대한 통제권과 에너지 안보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는 뜻이다. 프래킹을 금지하면 이런 통제권도 스스로 놓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세계 최대 산유국이 되었음에도 미국은 여전히 석유를 수입하고 있다. 그러나 셰일오일·가스 생산 덕분에 수입량은 2005년경에 비해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특히 OPEC으로부터의 수입이 줄고 캐나다에서 수입하는 비중이 늘었다. 중동과 러시아를 견제해야 하는 미국의 에너지 안보에서 프래킹은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해리스 부통령이 대선에 승리한 후에도 쉽게 말을 바꿔 프래킹 금지를 선언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배경이다.
워싱턴=이상은 한국경제 특파원 se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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