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안정복 (2) 신앙의 씨앗 뿌린 미션스쿨… 늘 마음속엔 예수님 존재

박지훈 2024. 9. 13.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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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의 골목대장 기질은 10대가 돼서도 여전했지만 문제아로 살진 않았다.

자주 어울리던 친구 중 몇몇은 담배를 피웠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를 비롯한 친구들은 수업이 끝나면 얼른 버스 정류장으로 뛰어가야 했지만 선생님 탓에 자주 버스를 놓치곤 했다.

공중으로 떠올랐던 선생님은 곧바로 바닥에 나뒹굴었고 나는 친구들과 줄행랑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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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상으로 학비 마련한 어머니 덕에
어려운 환경이지만 숭의실업고 입학
채플 참여하고 약식 세례도 받으며
어슴푸레하게나마 예수님 알게 돼
안정복 EM미디어 대표가 광주 숭의실업고등학교 재학 당시 찍은 증명사진.


유년기의 골목대장 기질은 10대가 돼서도 여전했지만 문제아로 살진 않았다. 자주 어울리던 친구 중 몇몇은 담배를 피웠지만 나는 아니었다. 종종 말썽은 부렸으나 큰 사고를 친 적은 없었다. 덩치가 큰 편이었고 힘도 셌지만 친구들과 주먹다짐을 하지도 않았다. 화가 나면 종잡을 수 없는 내 성격을 잘 알았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참으려고 했다.

그렇게 중학교 시절을 보내고 광주로 유학을 떠났다. 내가 들어간 학교는 숭의실업고등학교. 당시만 해도 내가 나고 자란 전남 화순에서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아이가 별로 없었다. 다들 경제적으로 힘들었으니 고교 진학은 언감생심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덕분이었다. 어머니는 아들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농사만으로는 자식들의 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었기에 어머니는 ‘보따리 장사’를 하면서 돈을 벌었다. 광주 금동시장에서 옷가게를 하던 외삼촌으로부터 저렴하게 옷을 사서 그것을 되파는 일을 했다. 세상 많은 사람이 그렇듯 어머니의 헌신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내 인생에서 큰 행운 중 하나는 숭의실업고등학교가 미션스쿨이었다는 게 아니었을까 싶다. 당시를 회상하면 떠오르는 선생님이 한 분 있는데 바로 김영근 선생님이다. 나를 비롯한 친구들은 수업이 끝나면 얼른 버스 정류장으로 뛰어가야 했지만 선생님 탓에 자주 버스를 놓치곤 했다. 선생님의 기도 때문이었다. 제자들을 신앙인의 길로 이끌기 위해 선생님은 종례를 할 때마다 5분 넘게 기도했다. 때로는 오랫동안 설교를 할 때도 있었다.

그때는 선생님이 미워서 친구들과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기도 했다. 학교 인근 야산으로 소풍을 갔을 때 일이다. 나는 친구들과 선생님을 헹가래 친 뒤 땅바닥에 떨어뜨리기로 했다. 공중으로 떠올랐던 선생님은 곧바로 바닥에 나뒹굴었고 나는 친구들과 줄행랑을 쳤다. 선생님은 다쳐서 다음 날 수업도 제대로 진행할 수 없었다. 그때 한심하게 우리를 쳐다보던 선생님의 눈빛을 기억한다.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할 수 있을 텐데….

어쨌든 그렇게 파란만장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당시엔 많은 학생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를 벌었는데 나는 치과에서 일했다. 막연하게 치과 의사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이것이 그때 내 장래희망이었노라고 말하긴 어려울 것 같다. 고등학교도 힘들게 다니는 주제에 의사가 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고교 시절이 내게 남긴 유산 가운데 하나만 꼽자면 바로 신앙이다.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채플에 참여했고 약식이었지만 세례도 받았다. 불교 집안에서 나고 자랐기에 기독교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랐지만 미션스쿨에 다닌 덕분에 어슴푸레하게나마 하나님이 누구인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때 하나님을 구주로 영접했던 것은 아니다. 교회에도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이때 내 마음에 신앙의 씨앗이 뿌려진 것 같다. 훗날 숱한 고난 끝에 서울로 상경했을 때 교회부터 떠올랐던 것은 미션스쿨에 다니면서 알게 된 예수님의 존재 때문이었다. 유년기나 청소년기에 교회가 어떤 곳인지 알게 되는 것,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끼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내가 그렇듯 그때의 경험이 훗날 크리스천으로 거듭나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되니까 말이다.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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