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이복현만 문제일까
시장에 많은 실망 안겼지만
원장만의 잘못 모는 건 문제
범부처 공조가 필요한데
컨트롤타워 없는 각자도생
희생양 만들기 아닌 성찰 필요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의 체면이 요새 말이 아니다. 명색이 ‘금융 검찰’의 수장인데 시장에 영이 안 선다. 지난 10일 18개 은행 은행장들과의 가계대출 간담회만 봐도 그렇다. 결론은 ‘은행의 자율적 관리 강화’. 은행이 대출 관리에 나선다는 건 당연한 업무다. 은행권에선 “오랜 시간 그리 들쑤시더니 막바지에 하나마나한 답을 내놓느냐”고 냉소를 짓는다.
이 원장은 올봄 성과급 잔치를 벌인 은행권에 ‘상생 금융’을 요구했다. 은행들이 대출금리 인하로 화답했다. 7월엔 시중의 금리 인하 기대감을 경고하며 대출금리 인상을 유도했다. 비판 여론이 커지자 “금리 올리는 걸 바란 게 아니다”라 했다. 은행들은 급히 대출 한도를 축소했다. 대출을 틀어막고선 “실수요자가 제약 받으면 안 된다(지난 4일)”고 다그쳤다. 어느새 오락가락 메신저의 대명사가 돼버렸다. 검사 출신 금감원장에 불만이 있던 경제 관료들이 거리를 두는 움직임도 엿보인다. 고립무원 처지다.
피해는 오롯이 서민 몫이다. 지난달 중순 입주가 시작된 경기도 재건축 아파트는 협약을 맺은 은행으로부터 조합원 대상 입주잔금대출 중단 통보를 받았다. 1주택자가 자녀 교육 문제로 집에 세를 주고 다른 곳으로 전세를 얻으려 할 때 전세대출이 막힌 곳들도 나타났다.
하지만 금융시장 혼선을 이 원장 탓으로만 돌리는 게 온당한가. 부채 문제는 부동산, 내수 상황과 밀접한 만큼 경제 부처, 대통령실의 공조와 조합이 중요하다. 금감원은 금융정책 실무를 책임지는 곳이어서 정책 입안 부처가 제대로 된 그림을 그려줘야 행정력 발휘가 원활해진다.
금융위원회는 대출 규제책인 2단계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적용을 시행 일주일 앞두고 7월에서 9월로 연기했다. 금융위가 “상황이 어려운 자영업자를 위해서”라고 설명했지만 시장은 “정부가 부동산 부양에 올인한다”로 받아들였다. 영끌이 몰려 DSR 시행 직전인 8월 주택담보대출은 통계 작성 이후 최대폭(9조3000억원)으로 급증했다. 이 원장의 메시지가 이 즈음 집중적으로 흔들렸는데 정부의 잘못된 신호가 한몫했음은 물론이다.
올해 7월까지 주택담보대출에서 가장 큰 비중(80%)을 차지한 게 국토교통부의 국민주택기금을 재원으로 하는 디딤돌, 버팀목 등 정책성 대출이다. 가계부채 급증의 주요 원인인데 정작 박상우 국토부 장관은 “정책대출 대상을 줄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채 위기의식이 결여됐다는 지적을 받았다. 게다가 박 장관도 “서울 집값 상승은 일시적” “서울에서 집을 사는 사람들은 금리에 민감하지 않다” 등 현실과 동떨어진 메시지로 논란을 일으켰다. 다른 부처 장관보다 현장과의 접점이 많은 금감원장의 말이 자주 부각됐을 뿐, 부처들 대처도 제각각이자 함량미달이었다.
더 문제인 건 경제부처 맏형 격인 기획재정부나 대통령실의 존재감 부재다. 당국과 부처들 간 이견이 있거나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우선순위를 신속히 정하려면 아무래도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 결국 기재부나 대통령실의 역할이 중요하다. 하지만 간섭을 안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지, 생색내기 어려운 분야라 보는지는 모르겠으나 도통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하긴 대통령실과 기재부부터 시장에 주는 메시지가 뒤죽박죽이니 무슨 말을 하겠나 싶다. 일시적 요인으로 인한 1분기 깜짝 성장률(1.3%)에 “민간 주도의 역동적 성장(대통령실)” “성장 경로의 청신호가 켜졌다(기재부)”며 흥분하다가 3개월 만에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서 체면을 구겼다. “경제가 확실히 살아나고 있다(윤석열 대통령)”와 “경기가 나빠 금리인하가 절실하다(대통령실)”는 메시지가 함께 나온다. 경제 흐름을 읽는 통찰력에 의문이 든다.
부동산과 빚의 문제는 민생과 직결되기에 부처들이 수시로 소통하며 숙의하고 정책 메시지를 정교하게 가다듬어야 한다. 하지만 정책에 큰 방향성이 없다보니 부처 간 엇박자도 잦고 메시지도 부실하다. 전임 문재인정부는 이념적 아집으로 하나가 돼 허황된 부동산 메시지를 자주 내놔 문제였는데 현 정부는 정반대로 각자도생급 대처로 신뢰를 잃고 있다. 부채의 엄정 관리 기조라는 메시지부터 부처가 확고히 공유한 뒤 컨트롤타워 체계 정립 등을 서둘러야 한다. 여론의 금감원장 비판에 다른 부처들이 팔짱이나 끼는 건 비겁하고도 위험하다.
고세욱 논설위원 swk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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