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미 대선 흔드는 ‘거짓말’의 정치학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탄핵된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이 결국 물러난 이유는 불법 도청이 아니라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거짓말 때문이었다. 닉슨에 이어 두 번째로 탄핵 대상이 된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역시 비슷했다. 성 추문이 아니라 조사 과정에서 밝혀진 거짓말이 사유가 됐다. 미국 최고 권력자에게 거짓말이 어떻게 치명상을 안기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선거판에서 상대 후보의 권위와 신뢰를 무너뜨리고 자신에게 불리한 문제는 논점을 흐려 피해 가는 대표적인 기술이 ‘거짓말쟁이’ 낙인찍기다. ‘세기의 대결’로 불린 10일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간 TV 토론. 눈길을 끈 건 두 후보가 약속이나 한 듯 서로 거짓말쟁이라고 몰아붙이는 장면이었다.
뜨거운 이슈인 낙태권 문제가 불을 댕겼다. 트럼프는 먼저 “해리스가 택한 부통령 후보는 임신 9개월 낙태도 괜찮고, 출생 후 죽임(execution after birth)도 괜찮다고 말한다”고 주장했다. 해리스는 “처음부터 말씀드렸듯 오늘 거짓말이 많이 나올 것”이라고 맞받으며 “트럼프가 재선하면 전국적인 낙태금지법에 서명할 것”이라고 역공을 폈다. 트럼프 역시 “완전히 거짓말”이라고 응수했다.
트럼프는 정부 기관을 향해서도 ‘거짓말’ 공격을 퍼부었다. 이민자 폭증의 심각성을 거론하며 “그들이 주민의 개와 고양이를 잡아먹는다”는 주장을 내놨다가 진행자가 “FBI는 범죄가 감소하고 있다고 한다”고 짚자 “FBI의 사기”라고 했다. 구체적인 근거는 대지 않았다.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로 잘 알려진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저서 『리더는 왜 거짓말을 하는가』에서 위정자가 ‘공포 조장’이나 ‘전략적 은폐’ 같은 유형의 거짓말을 했다가 들통나면 돌이킬 수 없는 실패를 맞을 위험이 크다고 경고한다. 대선 TV 토론은 후보의 자질과 품성, 능력을 검증하는 무대다. 미 국민 6700만여 명이 시청한 TV 토론에서 명확한 논거 없이 자신에게 불리한 얘기를 거짓말로 몰거나 사실관계를 비트는 허위 주장을 늘어놓는다면 책임 있는 국가 지도자의 모습이 아니다.
뉴욕타임스(NYT)를 비롯한 권위 있는 매체가 TV 토론에서 발언 하나하나를 팩트체크하는 것은 그래서다. NYT가 트럼프 발언 33건을 팩트체크한 결과 16건이 ‘거짓’으로 판단됐다. 해리스는 조사 대상 발언 8건 중 2건이 ‘거짓’으로 판정 받았다. 이런 팩트체크 결과와 11월 5일 대선 사이에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김형구 워싱턴 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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