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기자의 ‘영화로 보는 茶 이야기’]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 “라면 먹고 갈래요?” 그전에… “아이스티 한잔 하실래요?”가 있었다

김소연 매경이코노미 기자(sky6592@mk.co.kr) 2024. 9. 12.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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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먹고 갈래요?”

이영애가 유지태에게 “라면 먹고 갈래요?” 하던 그 순간의 떨림을~ 고스란히 기억하는 이가 얼마나 많을 텐가. 영화 ‘봄날은 간다(허진호 감독, 2001년 개봉)’ 이후 한국에서 “라면 먹고 갈래요?”는 도발? 유혹? 뭐 그런~ 일종의 관용표현(둘 이상의 낱말이 어울려 원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뜻으로 굳어져서 쓰이는 표현)이 됐다.

“라면 먹고 갈래요?”는 안타깝게도 원조가 아니다. 1995년에 개봉한, 중년로맨스영화의 대명사쯤으로 여겨지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이미 프란체스카(메릴 스트립)가 로버트(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써먹었다.

“아이스티 한잔 하실래요?”

영화의 줄거리는 아주아주 단순하다.

엄마 프란체스카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모인 딸(캐롤라인)과 아들(마이클). 그리고 변호사가 전해주는 엄마의 유품과 유언. 그런데 유언이 좀 이상하다. ‘화장을 한 후 로즈먼 다리에 유골을 뿌려달라’니.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버젓이 부부묘를 만들고 먼저 잠들어 있는데. 프란체스카가 남긴 유품 속에는 3권의 일기장도 있었고, 일기장에는왜 그런 유언을 했는지를 알 수 있는 절절한 프란체스카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딱 4일. 남편과 아이들이 집을 비웠던 그 날들, 우연히 로즈먼 다리 사진을 찍기 위해 매디슨 카운티에 온 내셔널 지오그래픽 소속 사진기자 로버트와 사이에 있었던 끝끝내 숨길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내 인생을 내 가족에게 바쳤으니

이제 내게 남은 것은 그 사람에게 주고 싶구나.”

영화를 보면서, 혹은 영화를 떠올리면서 잊어버리고 있던 얼굴을, 그 시절을, 그 스토리를 기억해내고 잠시 상념에 잠긴 분이 있을지도. 차 칼럼을 연재하는 필자는 뜬금없게도 ‘차의 지구사(헬렌 세이버리 지음)’라는 책이 떠올랐다.

중국인은 자그마한 찻잔으로 차를 홀짝이고, 일본인은 차를 휘저어 거품을 만든다. 미국에서는 얼음을 넣어 차갑게 내오고, 티베트인은 버터를 넣어 마신다. 러시아인은 레몬을 곁들이고, 북아프리카에서는 민트를 넣는다. 아프가니스탄인은 카르다몸(cardamom)으로 풍미를 더하고, 아일랜드인과 영국인은 밀크와 설탕을 넣어 갤런(gallon)으로 차를 마신다. 인도인은 연유를 넣어 차를 끓이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빌리(billy)’ 캔(야영할 때 쓰는 통조림 캔)으로 차를 끓인다. (차의 지구사 中)

미국에서는 얼음을 넣어 차갑게 내오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빌리캔’으로 차를 끓인다
오늘의 차 이야기 주인공은 프란체스카와 로버트를 이어준 바로 그 ‘아이스티’다.

차는 뜨겁게 마시는 것 아닌가? 원래는 뜨겁게 마셨다. 그래서 더운 여름에는 차를 자연스레 멀리 하게 된다. 로버트가 아이오와주 다리 사진을 찍으러 매디슨 카운티를 찾았을 때는 매우 더운 여름철이었다. 무더위에 길까지 잃고 한참 지쳐있는 로버트에게 “뜨거운 홍차 한잔 하실래요?”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마침 그 시절 미국에서는 아이스티가 유행하고 있었으니, 자연스레 “아이스티 한잔 하실래요?” 할 수 있었을 터.

실제 아이스티는 찌는 듯한 7월에 탄생했다. 고향은 미국. ‘미국 차’라고 생각해서일까. 지금도 미국에서 가장 많이 소비된다. 미국 차 소비의 80% 이상이 아이스티인 것으로 알려졌다.

1904년 찌는 듯한 7월의 어느 날,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국제무역박람회가 열렸다. 인도차 생산자협회 부스를 위탁 운영하던 영국인 리처드 블레친든은 인도차를 알리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진이 빠지는 날씨에 뜨거운 홍차에 관심을 가지는 이가 한명도 없었다. 절망에 빠진 블레친든은 불현듯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유리잔에 얼음을 채우고 홍차를 부어 맛보게 하면 어떨까. ‘시원한 차’ 입소문에 관람객이 물밀 듯 밀려왔고 인도차생산자협회 부스는 그야말로 초대박을 친다.

이렇게 우연하게 탄생한 아이스티는 이후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특히 미국에서는 차를 주로 아이스티로 즐기는 문화가 생겨났다. 미국 가정마다 냉장고에 항상 아이스티가 준비되어 있을 정도. ‘아이스티=미국 차’라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덕분에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홍차를 수입하는 나라 1위에 등극했다. 2위 러시아, 3위 파키스탄, 영국은 4위다.

프란체스카 역시 따로 차를 만들고 준비하고 할 것도 없이 그냥 유리주전자에 들어있던 아이스티를 컵에 따르고, 얼음을 넣고, 레몬을 넣을 건지 묻고, 다음에는 설탕을 넣을 건지 묻고, 그렇게 아이스티 한잔을 대접한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아이스티 얘기를 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티백’. 티백으로 간편하게 우려낸 차를 시원하게 만들어 아이스티로 먹는게 정석이기 때문이다.(간혹 가루차를 타 아이스티를 만들기도 하지만)

티백을 만들고 전 세계적으로 유행시킨 나라도 미국이다. 티백은 100여 년 전 미국에서, 마치 포스트잇처럼 우연에 의해 세상에 나타났다. 1908년 뉴욕의 차 수입상인 토머스 설리반이 고객에게 차 샘플을 보내면서 비용을 줄이기 위해 기존에 쓰던 비싼 주석 용기 대신 훨씬 가격이 저렴한 비단 주머니에 차를 넣어 보낸 것이 시작이다. 설리번은 그냥 차 샘플을 넣기 위해 비단 주머니를 선택한 것뿐이었는데, 고객들은 그대로 차를 우려마시면 된다고 생각하고 찻 주전자에 비단 주머니째 넣어 차를 우려 마셨다. 그런데 이게 웬일~ 차를 일일이 용량을 재어 덜어내지 않아도 되고, 다 마신 후 차 찌꺼기를 꺼내고 찻주전자를 꼼꼼하게 씻을 필요도 없는 게 아닌가.

엄청 편리하다고 생각한 고객 중 일부가 그 비단 주머니를 더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설리번은 그때부터 차를 1회용씩 소분해 비단 주머니에 넣어 팔기 시작했다. 비할 수 없는 간편함에 티백차는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비단 주머니는 더더더 값이 싼 거즈나 면으로, 최근에는 종이로 재질이 바뀌었다. 이제 티백은 가장 대표적인 차를 즐기는 방식으로 자리잡았다. 차의 종주국인 영국에서도 차 소비의 80% 이상을 티백이 차지할 정도다.

여름에 즐길 수 있는 차 ‘냉침차’ ‘냉말차’ ‘연꽃차’ 등
상온의 물 넣고 격불한 후 얼음 넣으면 ‘냉말차’ 완성
물론 영국인이 처음부터 티백차를 ‘얼씨구나’하고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차 종주국으로서 콧대가 높은 영국인은 처음에는 실용적인 티백을 무시했다. 그러다 1952년 립톤이 대기업으로는 처음으로 티백차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무시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립톤은 바로 이 티백으로 그때까지 영국에서 차 1위 업체였던 트와이닝을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여름에 마시는 시원한 차로 ‘냉말차’와 ‘연꽃차’등이 있다.
그럼 여름에는 주야장천 아이스티만 마셔야 할까? 물론 ‘절대 아니다’.

여름에 즐길 수 있는 차로 ‘냉침차’도 있고 ‘냉말차’도 있고 ‘연꽃차’도 있다.

‘냉침차’는 단어 그대로 차를 ‘냉하게’ 우려낸다는 의미다. 만드는 법은 전혀 어렵지 않다. 2리터 생수에 10~15g의 찻잎을 넣은 후 냉장고에 넣어 일정 시간 넣어두면 냉침차가 만들어진다. 녹차·백차·홍차·우롱차·보이차 모두 냉침차로 즐길 수 있다. 보통 녹차는 2~3시간, 우롱차는 6시간 이상, 홍차는 8시간 이상 냉침하면 맛있게 즐길 수 있다고 알려졌다.

‘냉말차’도 비슷하다. 다완에 말차가루를 넣은 후 상온의 물을 조금 넣어 말차가루를 갠다. 그다음 또 상온의 물을 넣어 격불한다. 격불이 마무리되면 얼음을 넣는다. ‘연꽃차’도 냉침차의 하나다. 새벽 꽃봉오리일때 딴 연꽃봉오리를 급속냉동했다, 뜨거운 물 살짝 붓고 꽃잎을 하나 하나 피운 후 냉녹차 등을 부어 마신다. 얼음을 넣어 마시기도 한다.

다시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이야기로. 젊은 시절 ‘책임감에 눌려 이루지 못한 안타까운 중년의 사랑 이야기’ 정도로만 이해했던 영화를 30년 넘 어 다시 보니 사랑 이야기 보다 꿈 이야기에 방점이 찍힌다. 잊었던 꿈을 기억나게 해준 로버트에게 끌리고 사랑하게 됐으니 같은 얘기 아닌가 할 수도 있지만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건….

프란체스카와 꿈에 대한 얘기를 나누던 로버트가 며칠 전에 적어뒀다며 들려주는 이 문장이 내내 귓가에 남는다.

“옛 꿈은 멋진 꿈이었다. 이루진 못했지만 가지고 있었다는 게 기쁘다.”

그 꿈은 프란체스카의 꿈이었을까, 로버트의 꿈이었을까. ‘이루지 못했지만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쁜’ 당신과 나의 꿈은 무엇일까.

최근에는 아이스티에 커피샷을 추가한 ‘아샷추’, 망고를 추가한 ‘아망추’등이 인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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