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영웅에서 불륜남까지, 18년 차 중견 배우의 십계명

이준목 2024. 9. 12.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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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이준목 기자]

"20년 치 일기를 그래프로 정리해 봤는데 정체됐으면 됐지, 떨어지지는 않았더라. 거북이처럼 차근차근 살아온 자신이 대견하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게 인생인 것 같다."

20년 무명을 이겨내고 국민영웅(<고려거란전쟁>)에서 국민 불륜남(<굿 파트너>)을 넘나들며 화제의 중심에 오른 배우 지승현의 고백이 시청자들의 공감을 자아냈다.

지난 11일 방송된 tvN <유퀴즈 온 더 블럭>에는 지승현이 출연해 자신의 연기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3연속 대박 드라마 출연
 방송 장면 갈무리
ⓒ tvN
지승현은 지난해 <연인>, <고려거란전쟁>에서 <굿 파트너>까지 출연작들이 3연속 대박을 터뜨리며 최근 가장 주목받는 배우의 반열에 올랐다. 요즘 세태의 현실적 이혼을 다룬 <굿 파트너>에서는 사극에서의 진중한 모습과는 180도 달라진 얄미운 불륜남 김지상 역을 완벽하게 소화하면서 이번엔 '국민 밉상남'으로 등극했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몰입감 넘치는 연기에 시청자들의 분노가 쏟아졌다. 결국 담당배우인 지승현이 직접 올린 '대국민 사과' 영상에는 누리꾼들의 조회수가 폭발하기도 했다.

"요즘 사과를 많이 하고 다녔더니 이렇게 유퀴즈에서도 불러주셨다"며 너스레를 떤 지승현은 "저는 작가님과 감독님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했을 뿐이다. 그래도 (극중 역할이) 그냥 나쁜 놈은 맞다"라고 실감 나는 빌런 연기에 대해 해명했다.

지승현은 자신의 SNS를 통해 시청자들을 향한 메시지에서 '김지상을 보고 화가 날 때는 양규 장군을 떠올려달라'는 부탁을 전했다. 그런데 <연인>에서 공연했던 배우 안은진이 이를 보고 "그러다가 <연인>의 구원무가 생각나서 화가 나면 어떻게 해야 하죠?"라며 재치 있는 댓글을 남겼다.

공교롭게도 지승현은 사극 <연인>에서도 아내인 유길채(안은진)을 두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남편 역할을 맡은 바 있다. 이를 본 지승현은 안은진과 시청자들에게 전하는 2차 사과 영상을 올렸다. 진중한 목소리로 웃음기 하나 없이 사과의 손하트까지 날리는 지승현의 천연덕스러운 모습이 압권이었다. 박장대소한 팬들은 '죄송할수록 잘나가는 배우', '드라마 찍고 이렇게 사과많이하는 배우 처음 본다'며 이를 유쾌하게 받아들였다.

그의 실제 아내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어느 날 아내와 함께 길을 가던 지승현은 남편이 최근 많은 사랑을 받아서 좋겠다는 한 팬의 인사에 차분한 목소리로"살아보세요"라고 답변해서 순간 지승현도 당황하게 했다고. 물론 실제 남편 지승현이 아닌 극 중 김지상을 겨냥한 농담이었다.

극 중 상대역이자 동갑내기 배우인 장나라와는 실제 부부 같은 자연스러운 티키타카가 돋보였다. 드라마상에서는 살벌하게 대립하는 연기를 하다가도, 카메라가 꺼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농담을 주고받으며 유쾌하게 촬영했다고 한다.

장나라는 "지승현은 한 장면이 끝날 때마다 손뼉을 친다. 오케이가 난 기쁨을 표현하는 자신만의 세리머니라더라. 그런데 방금 진지하게 싸우는 장면을 찍고나서 곧바로 표정이 바뀌어 손뼉을 치는 모습이 진짜 웃기더라"는 뒷이야기를 전했다. 그러면서 "말투에도 애교가 많다. 현장에서 말랑말랑하게 주변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매력이 있더라. 본체는 되게 귀여우시다"고 지승현을 칭찬했다.

지승현의 사과 퍼포먼스를 두고는 "저한테 사과하실 일은 없다. 하지만 차은경(장나라의 극 중 배역)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며 장난으로 화답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18년차 중견배우 지승현
 방송 장면 갈무리
ⓒ tvN
최근에 급부상한 것 같지만 사실 지승현은 무려 데뷔 18년 차의 중견배우다. 27세였던 2007년 고현정, 마동석 주연의 MBC 형사드라마 <히트>에서 단역에 가까운 경찰 역할이 그의 늦은 데뷔작이었다. 그나마 두 마디였던 대사가 현장에서 한 마디로 줄어서 슬펐다는 일화를 농담처럼 전하며 힘들었던 무명 시절을 떠올렸다.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난 지승현은 부모님의 강한 반대와 졸업 후 군복무 등으로 연기 생활을 사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다. 경희대 재학 시절에는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한때는 아나운서를 지망하며 YTN 1차 시험에 합격했던 기록도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연기에 대한 열망은 숨길 수 없었다. 지승현은 데뷔 이후 7-8년 가까이 소속사도 없이 혼자 프로필을 여기저기 돌리는 수고를 견디며 배우 생활의 의지를 이어갔다.

본격적으로 지승현이라는 배우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영화 <바람>이었다. 개봉 이후 뒤늦게 입소문을 타면서 마니아 팬들에게'비공식 천만영화'라는 극찬을 받은 <바람>은, 주연배우 정우의 자전적 경험담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로 학교 불법서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뤘다. 여기에 지승현은 패거리의 선봉에 서는 '광산 김정완' 역을 연기하면서 특유의 진중한 목소리와 눈빛으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지승현은 "<바람>은 제 출연작 중 처음으로 극장에 걸린 작품이었다. 제 얼굴이 스크린에 그렇게 크게 나오는 걸 처음 봤다. 연기를 반대하던 아버지도 처음으로 인정을 해주셔서 선생님들과 함께 극장에 오셨었다"고 뿌듯해하면서도 "그런데 아들이 극 중에서 교복을 입고 담배를 피워가며 욕설을 하고 있으니까 아버지가 돌아오시고 나서 표정이 좋지 않더라"는 반전의 뒷이야기를 전하며 폭소를 자아냈다.

하지만 <바람> 이후로도 한동안 지승현은 여전히 긴 무명 생활을 겪어야 했다. 생계 문제를 위하여 연기를 하면서도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야 했다. 또한 현장에서 단역을 하다가 모멸적인 상황을 겪는 일도 많았다. 한 연출자가 지승현의 모습을 보자마자 면전에서 "누가 저런 XX를 불렀나"라고 화를 내기도 하고, 지승현이 모욕을 당할 때 주변에서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지승현은 "단역을 하면서 왠지 모르게 서운하고 주눅이 들게 되더라"며 힘들었던 시절을 돌아봤다.

십계명으로 마음 다잡아

지승현은 자신을 위한 '십계명'을 세우며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나는 세계에서 최고로 인정받는 배우다', '내 인생은 더 잘될 것이다', '항상 모든 것이 감사합니다'라는 자기 암시를 주문처럼 되새기며 스스로를 격려했다고 한다.

그는 또 매일 일기를 쓰면서 자신의 연기 인생과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지승현은 과거 일기의 한 대목을 낭독하며 "지혜롭게 처신하며 올바른 선택을 하자, 다시 한번 파이팅이다"라고 긍정적인 삶의 자세를 되새기다가 과거의 추억에 잠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유재석 역시 자전적인 경험담을 되새기며 "오디션에 자꾸 떨어지다 보면 마음의 상처가 쌓이고, 내가 이 일이 맞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내공 있는 연기를 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 될 수도 있다"며 지승현의 이야기에 공감했다.

지승현의 출세작이 된 2016년 2월 <태양의 후예>가 방영되기 직전에는, 사실 연기 생활에 한계를 느껴 이 작품을 마지막 은퇴작으로 생각했던 시기도 있었다. 지승현은 극중 주인공의 라이벌인 북한군 안정준 상위 역을 열연했고, 운명처럼 드라마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지승현 역시 뒤늦게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출연작이 늘어나고 비중도 높아지면서 지승현도 생활이 안정되고 연기자로 자리를 잡아나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2023년 <고려거란전쟁>은 지승현의 연기 인생에 중대한 전환점이 된 작품이다. 대하사극에서 첫 주조연급 배역을 맡게 된 지승현은 현종, 강감찬과 함께 고려의 3대 영웅 중 하나인 양규 장군 역을 열연했다는 극찬을 받았다.

지승현은 "양규 장군 역을 처음 들었을 때는 '어, 이런 분이 있었어?'라고 할 만큼 업적을 전혀 몰랐다. 그래서 배역을 맡고 나서 현장에서 늘 이런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내가 연기를 잘해서 양규 장군을 모두가 알게 하겠다'고. 연기 이외의 목표가 하나 더 생겼고, 그 숙제를 잘 풀어나가려고 열심히 노력했더니 '인생 캐릭터'로 돌아온 것 같다."고 양규 장군 역할에 대한 애착을 드러냈다.

이 작품에서의 열연으로 지승현은 KBS 연기대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지승현은 이 작품으로 그동안 역사에서 많은 조명되지 못했던 양규 장군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데 기여했다는 면에서 남다른 자부심과 애정을 드러냈다.

한편으로 지승현은 자신의 20년 치 일기로 정리한 인생 그래프를 돌아보며, 비록 느리지만 멈추거나 퇴행하지 않고 거북이처럼 꾸준히 달려온 연기와 인생을 돌아봤다. 지난 2012년에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며 써놨던 '미래 일기'가 시간이 흘러 다시 확인하더니 "제가 쓴 그대로 실현됐더라"는 놀라운 이야기를 밝히며 긍정적인 생각과 꿈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지승현은 우직하게 흔들리지 않고 연기 인생을 이어온 '나'에게 들려주고 싶은 메시지를 전했다. 지승현은 "지난 18년 동안 묵묵하게 꿈을 위해서 달려왔는데, 정말 잘해왔고 앞으로도 잘해갈 거다. 너는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가 될 것이다. 파이팅"이라고 기운차게 스스로를 격려하며 앞으로도 새롭게 써 내려 나갈 또 다른 연기 인생을 기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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