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패션모델과 퇴직한 노판사의 '기묘한' 우애

김상목 2024. 9. 12.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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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세 가지 색 - 레드>

[김상목 기자]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제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 색' 연작 중 마지막 작업인 <세 가지 색 – 레드> 차례다. 아마 영화를 본 이들보다 주인공의 옆얼굴이 클로즈업된 포스터가 더 익숙할 <레드>를 오랜만에 보니, 영화 속 주제가 예언처럼 진하게 새겨졌다.

마치 좋은 술이 오래 숙성되면 이렇게 갓 빚었을 때와는 다른 맛으로 변하는 걸까 싶을 정도다. 그만큼 작품이 시사하는 바가 오히려 2024년 현실에 더 적절해 보였다. 대체 영화가 무슨 이야기를 전하길래.

퇴직한 판사의 일상
 '세 가지 색 - 레드' 스틸
ⓒ ㈜스튜디오 산타클로스엔터테인먼트
'발렌틴'은 패션모델로 활동하는 대학생이다. 애인은 영국에 있어 전화로만 연락을 주고받지만, 목소리로만 등장하는 남자친구는 때로는 집착하고 때로는 무신경하기만 하다. 발렌틴은 그런 애인에게 맞추려 노력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화보 촬영을 마친 발렌틴은 귀갓길에 개를 치고 만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인다. 인식표에 적힌 주소로 찾아가 사고를 알리고 상의하려 하지만, 개의 주인인 노인은 알아서 하라며 냉담한 태도다. 노인의 집은 삶을 포기한 사람 마냥 을씨년스럽고, 기이한 기계들로 가득하다. 발렌틴은 개를 동물병원에서 치료하던 중 임신한 상태임을 알게 된다. 개를 자신이 당분간 보호하기로 한다.

'리타'라 이름 붙인 개와 산책 중 잠깐 목줄을 푼 사이 개는 어디론가 쏜살같이 뛰어간다. 급히 개를 추적한 발렌틴은 노인의 집으로 돌아온 리타를 발견한다. 문이 열려 있기에 이참에 개에 대해 의논할 겸 발렌틴은 다시 안으로 들어간다. 내부를 관찰하던 그는 노인이 이웃집 전화를 일상적으로 도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유를 묻는다. 발렌틴은 노인이 아무렇지 않은 듯 타인의 사생활을 염탐하는 데 혐오감을 느낀다.

하지만 정작 범인은 태연자약하다. 그는 발렌틴에게 본인이 도청하던 이웃집 남자의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가서 알려도 된다고 하지만, 정작 이웃을 찾아간 발렌틴은 마음이 걸려 사실을 알리지 못한다. 이웃집 남자의 진실이 그의 가족에게 알려지는 순간 일어날 파장이 두렵다. 발렌틴은 노인이 왜 그런 기행을 일삼는지 확인하고자 한다. 노인은 자신이 퇴직한 판사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는 판사로 일하는 과정에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회의에 빠졌다. 법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불신해 은퇴를 결정한 것이다. 발렌틴은 그의 고뇌에 연민을 느끼고, 노인의 고통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공화국 시민'의 이념과 덕목
 '세 가지 색 - 레드' 스틸
ⓒ ㈜스튜디오 산타클로스엔터테인먼트
타인에 대한 회의, 정의가 갖는 모호함에 지친 노인은 남의 고통을 수용하고 도우려는 발렌틴과의 교류로 오랫동안 멈춰 있던 온기를 조금씩 회복한다. 그는 자신이 중독된 도청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중단하는 건 물론, 응당 짊어져야 할 책임과 비난을 기꺼이 감수한다. 발렌틴 역시 노인의 결단을 이해하고 그에게 친밀감을 느낀다. 노인은 젊은 말벗에게 자신이 겪은 인생의 실패와 교훈을 전하며 상대가 행복을 위한 결단을 내릴 수 있게 조언한다. 하지만 자신의 충고가 발렌틴에게 위기를 안겼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느낀다.

<블루>가 개인의 자유를, <화이트>가 상호 평등을 주제로 삼았다면, <레드>는 확장된 사회 속에서 우애와 연대의 의미를 곱씹게 하려는 기획 아래 놓인 작업이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 색> 3부작은 누누이 언급한 것처럼, 프랑스 공화국의 국기, '삼색기'의 이념을 영화로 구현하고자 하는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당연히 각 편의 구심이라 할 '자유'-'평등'-'박애'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로 설정된다. 이 의도를 이해하지 않고는 3부작을 온전히 소화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세 가지 색' 3부작은 토대가 탄탄한 건축 설계처럼 분명한 목적 아래 진행된다. 첫 편 <블루>는 한 사람, 두 번째 <화이트>는 연인 관계를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마지막 편 <레드>는 1 ⇒ 1+1 ⇒ 1+1+a로 확대되는 주제와 서사를 통해 공화국 시민(나아가 통합된 유럽 시민)이 지향할 자세와 전망을 관객 앞에 청사진처럼 펼쳐내고자 한다. 1+1=2로만 그치지 않는다는 건 전작 <화이트>에서 이미 증명한 바 있다. 이제는 평범한 개인의 일상이 어떻게 전혀 알지 못한 가운데 서로 연결되는지, 그리고 각자의 삶에 어떻게 개입하는지를 거대한 풍속화처럼 그려낼 야심이 거장의 솜씨로 화면 가득히 구현될 차례인 것이다.

그런 거대한 설정은 도입부에서 곧바로 구현된다. 어두웠던 화면이 밝아지자 모두가 손꼽아 기다릴 포스터 속 이미지, 발렌틴의 옆얼굴 대신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온갖 케이블과 전선의 연결이 상당 시간 계속된다. 대체 무슨 뜻일까? 영화를 끝까지 봐야만 '수미상관(首尾相關)'으로 이해 가능한 대목이다. 일단 수수께끼로 남겨두자.

나와 세계의 연결
 '세 가지 색 - 레드' 스틸
ⓒ ㈜스튜디오 산타클로스엔터테인먼트
영화 속 세계는 지금처럼 스마트폰으로 실시간 세계와 접속까진 아니지만, 해외와 직통으로 전화 통화를 하거나 인접국 경계는 가볍게 넘어갈 수 있던 1990년대 초반이다. 영화 속 배경인 프랑스에선 이미 10년 전부터 PC 통신 초기 형태 '미니텔'이 보급된 시절이다. 그만큼 세계는 급속도로 연결되고 있었다. 유럽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정도다. 하지만 기술 발전에 인류의 성숙이 뒤처진 것처럼 보일 만큼 단절과 불안은 오히려 심화하던 시절이기도 하다.

발렌틴은 도버 해협 건너 영국에서 (뭘 하는지는 당최 알 길 없는) 남자친구가 전화를 걸면 상시 대기하길 강요받는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대화는 애인이 자신의 갈증을 풀고 나면 금방 시들고 만다. 애인은 발렌틴이 어디서 뭘 하는지, 왜 전화를 바로 받지 않는지에만 촉각을 곤두세울 뿐, 상대가 무엇을 바라는가에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발렌틴은 다르다. 무심코 넘어가도 별 탈 없을, 집 나온 개와의 접촉 사고나 동네에서 공병 폐기를 힘들어하는 노파를 돕는 데 주저함이 없다. 자신만의 정의감을 충족하기보다는, 자신의 행위가 일으킬 파장을 세심하게 고려한다. 타인에게 친절하고 감정적으로 치우치지 않으며 배려심이 전제된 태도를 포기하지 않는다.

노인은 발렌틴과의 첫 만남 당시 '전능자'의 위치에 서 있었다. 그는 타인을 내려다보며 이웃들의 일상을 속속들이 들을 수 있는 권능을 행사한다. 발렌틴의 집 주소 정도는 어렵지 않게 파악할 정도다. 하지만 정작 이웃들의 비밀을 꿰뚫고 있지만, 그는 무언가를 행하거나 그들의 삶에 개입하지 않는다. 사려 깊은 배려라기보단, 그저 무관심과 냉소로 일관하는 태도다. 인생에서 경험한 몇 번의 쓰라린 경험과 너무 많은 걸 알게 된 탓의 복합작용이다. 그는 정의와 불의를 엄격히 판정하는 고단한 책무를 오랫동안 수행해 왔지만, 정작 본인 스스로는 판단력을 잃어버렸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이면의 진실 사이의 괴리감, '심판'으로 초래될 이후의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무기력한 관음증 환자로 전락시킨 것이다.

하지만 세상을 향한 관심과 연민을 간직한 발렌틴을 만나게 되면서 노인은 마치 부활하듯 재기한다. 물론 겉으로 그에게 일어난 변화는 도청이 들통나면서 책임을 짊어지게 되는 부정적인 것들에 불과하지만 노인은 독립된 개인이 저지른 과실은 당연히 감내해야 한다는 '시민'의 책무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법과 제도의 책임을 초월해 타인의 안전과 행복을 기원하며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몫을 다하려 한다. 민주공화국의 시민이라면 당연히 지녀야 할 기본 소양이지만, 요즘 우리 사회에서 이런 덕목이 얼마나 무시당하고 소중한 가치가 땅바닥에 추락한 지 오래인지 떠올려보면 <레드>의 주제의식이 새삼 사무치는 걸 어쩔 수 없다.

'박애' 실천하고 있을까
 '세 가지 색' 3부작 포스터
ⓒ ㈜스튜디오 산타클로스엔터테인먼트
이야기는 발렌틴과 노판사의 기묘한 우애를 중심축으로 풀어내지만, 시작부터 내내 특별한 설명 없이 발렌틴 이웃에 사는 법대생 '오귀스트'의 일상이 잊을만하면 삽입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오귀스트는 발렌틴과 연결되는 구석이 전혀 없는데 나오는 비중은 적지 않다. 관객은 이 인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종잡을 도리가 없다. 예비 법조인이라는 점에서 노판사와 이어지는 에피소드를 그려 보지만, 그것도 상상에 그칠 뿐이다. 대체 저 인물은 이 영화 속에서 어떤 몫을 소화하는 걸까? 미스터리는 최종 단락에 가서야 도미노 무너지듯 술술 풀리기 시작한다. 그때까진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추측할 수밖엔 없다.

<레드>에서 세계는 이미 연결되어 있다. 그저 연결된 것으로 그치지 않고 엉켜 있다 봐도 좋을 정도다. 세상 만물은 서로 돕거나 적대하거나 가능성을 모두 품은 채 존재하지만, 우리가 이를 어떻게 인식하고 시선을 돌리는지에 따라 상황은 판이하게 변할 테다. 발렌틴이 개를 길에 버려두고 가버렸다면, 도청 사실을 안 자신을 도발하는 노인의 공세에 즉자적으로 반응했다면 과연 영화의 결말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거장은 유작을 통해 세계와 개인은 동떨어진 관계일 수 없다는 엄연한, 하지만 많은 이들이 부정하거나 외면하는 '진실'을 명명백백하게 구현해 놓았다. 반박하기 불가능할 정도의 논증이다.

3부작의 주요 등장인물이 영화의 종막에서 한자리에 모인다. 다만 상황은 그리 좋진 않아 보인다. 사회적 참사의 한복판에서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역사에 손꼽히는 3부작의 에필로그 장면에서 굳이 그들을 모이게 한 건 그저 카메오 출연 팬 서비스를 초월하는 함의로 뇌리에 남는다. 나와 너, 우리 세계는 그렇게 동시성으로 연결된다는 믿음과 소망이 마침내 <레드>에서 완성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로부터 30년, 지금의 세계는 거장이 유작에서 염원했던 전망보다 무척 많이 나빠진 듯하다. <세 가지 색> 연작을 보고 나면 누구나 영화 밖 우리의 현실을 고민하게 될 테다. 그럴 수밖에 없다.

<작품정보>

세 가지 색 - 레드
Trois Couleurs: Rouge
1993 프랑스 드라마
2024.09.18. (재)개봉 94분 15세 관람가
감독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출연 이렌 자코브(발렌틴 역), 장루이 트랭티냥(노판사 역)
수입 ㈜안다미로
제공/배급 ㈜스튜디오 산타클로스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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