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어도 되지만 새에게 양보하세요

원미영 2024. 9. 12.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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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즐기기 더없이 좋은 계절에 간 가평 잣향기푸른숲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원미영 기자]

" 내일 잣향기푸른숲 등산 가실 분?"

단톡방 메시지가 울렸다. 5년 동안 참여한 독서 모임 회원들과의 대화방이다. 올해 초 각자의 사정으로 더 이상 모임을 지속하기 어려워 독서 모임은 파했지만, 사람과의 관계가 무 자르듯 단칼에 끝나는 것은 아니더라. 여전히 남아있는 대화방에서는 가끔 뜻밖의 제안으로 번개가 성사되기도 하고, 각자 읽은 책 중에 인상 깊었던 혹은 별로였던 책 이야기도 한다.

'등산이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맘속으로 당연히 'NO'를 외쳤다. 일을 하며 피곤하다는 핑계로 운동도 멀리하고, 가벼운 산책도 마다해왔다. 갑자기 산에 오르면 몸이 놀라지 않을까? 어설픈 합리화를 하며 가지 않을 궁리를 했다. 약속은 정해졌다. 굳은 결심과는 달리 선선한 바람에 묻은 가을 냄새가 자꾸만 나를 산으로 밀어냈다. 결국 나도 갑작스러운 만남에 가담했다.

생각해 보니 가평에 살며 잣향기푸른숲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축령산과 서리산 자락 해발 450~600m에 있는 잣향기푸른숲은 수령 80년 이상의 잣나무가 국내 최대로 식생하고 있는 곳이다. 숲 체험과 산림치유 프로그램 등 다양한 체험 행사도 즐길 수 있는 산림휴양 공간이다. 땅덩어리가 넓은 가평이라 내가 사는 곳에서도 차로 40분 정도 가야 했다.

10년 차 운전자이지만 나는 내비게이션이 없으면 어디도 갈 수 없는 알아주는 길치이다. 이른 아침, 내비게이션이 친절히 안내하는 숲으로 향했다. 도로옆 벚나무에서 벌써 노랗게 물든 잎들이 바람에 떨어졌다. 한때 몽글몽글한 꽃을 피우고, 꽃비를 흩뿌렸을 벚나무의 화려한 계절을 추억했다.

큰 도로를 지나 굽이굽이 경사가 있는 일 차선 도로를 계속 올라가며 진정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 불안했다. 뒤에서 차 몇 대가 바짝 붙어 따라오고 불길함이 극에 달했을 즈음 내비게이션에서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내가 나왔다.

급조된 만남엔 나를 포함 네 사람이 나왔다. 청바지에 티셔츠, 운동화 차림의 나와는 다르게 등산복에 등산화까지 챙긴 MBTI 파워 J 지인의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어른은 천 원의 입장료를 받지만, 지역 주민은 무료입장이다. 신분증을 챙기지 않아 천 원을 결제해야 했다. 화장실에 들렀다 우리는 힘차게 숲으로 출발했다.
 잣향기푸른숲- 동화 속에 나올 법한 오솔길
ⓒ 원미영
잣향기푸른숲에는 '무장애 나눔길'이 1km가량 조성되어 있다. 완만한 데크길은 몸이 조금 불편한 사람도, 휠체어를 탄 사람도, 유모차에 탄 아기도, 험한 산행이 어려운 어린이도 누구나 편하게 숲을 즐길 수 있다.

데크길을 지나 나오는 흙길은 경사가 더 가팔랐지만, 여기저기 보이는 고운 야생화와 열매들이 산행의 고단함과 지루함을 달래주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숨이 턱까지 차오른 채 일행과 나누는 대화는 정겹고 다정했다.

곧게 뻗은 키 큰 잣나무 군락을 올려다보니 가슴이 뻥 뚫리는 듯했다. 피톤치드가 무엇인지 온몸으로 느끼며 신선한 공기를 폐 속 깊이 들이켰다.

순간 데크 난간 위로 청설모가 쪼르르 달려갔다. 그토록 가까이서 보긴 처음이었다. 터져 나오는 환호 소리에 놀란 청설모는 잣나무 꼭대기의 보이지 않는 높이까지 단숨에 뛰어올라 사라졌다.

산에서 만난 열매

이따금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잣송이가 떨어졌다. 제법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잣송이에 머리를 맞을까 아찔했다. 초록의 잣송이가 신기해 만져보니 찐득한 송진이 손에 묻어났다.

잣나무와 잣송이를 살펴보면 판매하는 잣이 왜 그렇게나 비싼지 알 수 있다. 잣을 수확하기 위해서는, 평균 키가 20~30m이고 40m를 넘기도 하는 잣나무 위를 사람이 직접 올라가 가지 끝에 달린 잣송이를 따야 한다. 위험 부담이 크고 일일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는 잣 수확 과정을 생각하면 비싼 이유가 자연스럽게 납득이 된다.

실제로 잣 채취 전문가가 EBS <극한직업> 편에 나오기도 했다. 초록의 잣송이를 까내면 은행처럼 딱딱한 껍데기로 싸인 낱알이 나온다. 딱딱한 겉껍데기 속 얇은 속껍질을 까면 우리가 아는 뽀얀 잣을 만날 수 있다.

그나마 지금은 껍질을 발라내는 작업이 기계화되어 가격이 조금 떨어진 것이라고 한다. 조금 전에 만난 깜찍한 청설모의 든든한 겨울 양식이 되길 바라며 잣송이를 제자리에 얌전히 두고 갈 길을 나섰다.
 잣나무에서 떨어진 잣송이
ⓒ 원미영
우리는 산 중턱에서 산딸나무의 붉은 열매를 먹을 수 있을지 옥신각신했다. 초여름에 핀 하얀색의 커다랗고 청순한 꽃의 자태에 입을 다물지 못했는데, 열매까지 이토록 귀엽다니. 나무 아래엔 이미 붉게 익은 열매들이 잔뜩 떨어져 있었다. 손이 닿는 열매 하나를 따서 살짝 깨물었다. 서걱서걱 설탕이 씹히는 듯한 식감에 부드럽고 달콤했다.
베트남에서 먹어본 석과(슈가애플)과 비슷한 맛이었다. 찾아보니 산딸나무 열매는 비타민과 카로틴, 안토시아닌이 풍부해 눈 건강과 피로 해소에 좋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선 사람들이 먹지 않아 새들의 차지가 된다고 한다. 어쩌면 처음부터 새들이 주인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산딸나무 열매- 설탕이 씹히는 식감에 부드럽고 달콤한 맛
ⓒ 원미영
걸음이 느려 답답했는지 뒤를 따르던 중년의 아주머니 두 분이 '먼저 갈게요' 하며 우리를 앞질러 갔다. 천천히 맨발 걷기를 하던 할아버지는 '안녕하세요' 하고 먼저 짧은 인사를 건넸다.

조금 더 올라가니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 군인 아저씨 아니 군인 총각(?)들을 만났다. 등산을 온 것인지, 작업을 하러 온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냥 존재만으로도 고마운 마음이 들어 가벼운 목례를 했다. 총각들도 깍듯이 인사를 한다.

비를 만나는 바람에 우리는 부랴부랴 내려와 잣두부 전골과 청국장으로 점심을 먹고 헤어졌다. 또 언젠가 소집될 기분 좋은 만남을 기약하며.

어차피 내려올 거 왜 올라가냐고 볼멘소리하던 나다. 그러나 숨소리와 발걸음에 집중하며 각자의 속도대로 걷는 사람들을 보니 이 숲 속엔 내가 알지 못하는, 그들만 아는 엄청난 비밀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숲과 산으로 향하기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비밀은 천천히 알아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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