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르포]정치 시끄러운 태국, 투자할 가치 있을까?
22차례 軍쿠데타로 정치 혼란
왕실·군부 중심 정치구조속
지난달 탁신 딸 총리 등극 변수
외국인 투자엔 열린 자세 유지
경제 환경의 가치는 계속 중요
태국 투자청과 주한태국 대사관이 주관하는 대규모 태국 투자설명회가 8월26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렸다. 태국 정부가 주도하는 행사이니만큼 멀리 방콕서 찾아온 수십 명의 고위 관계자들과 수백 명의 국내 기업인들이 몰려 성황을 이뤘다. 이날 행사에서 태국은 자신들이 꿈꾸는 차세대 성장산업 ▲디지털경제 ▲의료 ▲바이오테크놀로지 ▲자동차&로보틱스 ▲우주공학 등의 분야에 대해 특별한 외국인 투자 혜택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최근 현대차가 발표한 태국에 10억바트(약 390억원) 규모의 전기차 조립공장과 배터리 모듈 공장을 세운다는 소식도, 행사장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그런데 행사를 지켜본 언론의 관심은 차가웠다. 관련 기사 하나 찾아보기 쉽지 않았던 것. 국내 미디어가 보기에 태국은 한국 기업이 진출해 성공하기에 적당한 나라라고 보지 않았다. 세계 1~2위를 다투는 관광대국 태국은 실제로 우리와 경제적 교역은 미지근한 편이다. 교역 규모는 14위로 같은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국가 베트남(3위)에 비하면 20% 정도에 불과해 중요성은 크게 뒤처진다.
하지만 필리핀(13위), 인도네시아(15위)와 엇비슷하기 때문에 절대로 간과할 수는 없는 수준이라는 것도 확실하다. 아세안의 중심국가 태국의 전략적 중요성은 유명하다. 아세안의 한복판에서 교통과 물류의 중심 역할을 하며, 풍부하고 저렴한 노동력과 내수시장도 매력이다. 산업인프라도 인근 나라들과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수준이 높다.
◆태국, 중진국 함정=그런데도 아세안의 전통적인 경제선진국 태국이 우리와 경제 교역이 활발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태국은 지난 세기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한때 세계를 선도한 일본의 자동차·전자 산업은 태국을 공급망의 파트너로 삼아 1970년대 이후 부품 소재 산업을 현지로 대거 이전한 것이다. 태국은 이를 기반으로 아세안 지역의 경제 맹주로 활약했지만 자연스레 한국기업과의 인연은 멀어지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일본 경제로의 종속은 태국에는 축복이자 뚜렷한 한계로 작용했는데, 그 많은 일본 자동차 관련 기업들은 태국에 수많은 부품업체와 조립공장은 지었지만 연구개발(R&D) 연구소 설립에는 극히 인색한 것이 한 사례가 된다. 자연스레 태국은 지금도 세계적인 자국 브랜드 없이 1인당 GDP 8000달러 미만으로 '중진국 함정(middle income trap)'에서 탈출하지 못한 상황. 일본 편향적 경제 구조를 바꾸기 위한 노력도 본격화됐다.
혼란스러운 태국 정치도 중진국 함정에 한몫했다는 평가다. 군부의 영향력이 드세서 1932년 이후 무려 22차례의 군사 쿠데타가 있었고, 13차례나 무력에 의한 정권교체로 이어졌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의 시발점이 된 태국은 이후 대대적 정치개혁을 꾀했는데, 그 과정에서 급부상한 '탁신 친나왓'이라는 개혁적이면서도 포퓰리스트 정치인을 놓고 갈등이 극한에 이르게 된다. 매번 선거에서 친(親) 탁신당이 선거에서 이기면 군부와 헌법재판소가 이를 거부하는 상황이 반복된 것이다.
◆탁신의 딸의 총리 등극=근래 태국 정치권의 변화무쌍함은 인연이 적은 한국에서 도저히 그 속도와 폭을 따라잡기 힘들다. 가장 최신 뉴스는 8월16일 탁신의 딸인 패통탄 친나왓 프어타이당(Pheu Thai Party·태국을 위한 당) 대표(38)가 역대 최연소로 제31대 태국 총리로 선출이 되었다는 소식. 지난 1년간 총리로 활약한 이는 같은 당 소속 세타 타위신 총리(62)였다. 지난해 5월 벌어진 총선에선 오랜 금기인 ‘왕실개혁’을 전면에 내세운 피타 림짜른낫의 전진당이 제1당, 탁신당으로 유명한 프어타이당이 제2당으로 부상하면서 2014년 쿠데타 이후 이어온 9년 군부체제의 종식을 알렸다.
이 밖에도 탁신이 무려 15년이 넘는 국외 망명 생활을 마치고 태국으로 귀환해 수감되었다는 소식도 세계적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탁신은 오랜 골칫거리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런 탁신의 딸이 이번에 총리에 올랐으니 태국 바깥에선 이를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럽다. 신임 패통탄 총리 체제는 과연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는지, 또다시 쿠데타 우려도 높다.
도통 이해할 수 없이 태국의 정치는 실제로 완벽하게 이해하거나 해설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하고 애매모호하다. 태국을 깊이 연구한 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태국정치의 후진성이 아닌 특이성으로 이해해 달라”고 주문한다. 김홍구 부산외대 명예교수는 “혁명적 상황 없이는 현재의 왕실·군부 중심의 정치구조가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면서 “큰 맥락에서는 세계적인 갈등 구조와 흐름과 차이가 없다”고 설명한다. 즉 젊고 중산층에 근접할수록 뚜렷하고 확고한 변화를 추구하지만 부유한 특권층과 군부의 벽이 워낙 강고해 생기는 갈등이라는 얘기다.
◆후진성 아닌 특이성=지난해 총선에서 대도시 방콕의 지역구를 싹쓸이하며 제1당으로 떠오른 전진당의 ‘피타 림짜른낫’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이 같은 정치격변 와중에 헌법재판소 판결에 의해 당의 해산과 더불어 자신의 10년이라는 정치금지령 판결을 받게 된다. 무려 제1당으로 대표로 총리 후보로 유력했던 인기 절정 정치인의 정치생명이 간단하게 끝나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2017년 이전엔 '탁신'이 태국의 오랜 기득권 세력과 적대적 관계였다면 이제 탁신 일가는 완벽하게 제도권으로 편입되었다는 것이고, 동시에 피타 림짜른낫을 비롯한 전진당 세력이 타깃이 되었다는 얘기다. 태국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왕실 개혁' 논의를 총선에서 공론화한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 된 것이다.
이러한 극한 대립의 와중에도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역사적으로 태국은 정치가 경제를 무너뜨리는 수준으로까지 자해한 적이 없었다는 대목이다. 특히 외국인 투자에 대한 열린 자세는 아시아 전역을 통틀어 봐도 최상급으로 손꼽힌다. 최근 베트남 경제의 급성장으로 가장 긴장하는 나라는 단연코 인접한 태국이기도 하다. 갈등보다는 협력이 절실한 상황.
방콕 거리의 화려한 백화점 뒤로 여러 그늘이 잠재해 있다. 낮은 교육열, 심각한 부익부 빈익빈, 정치 갈등과 불신, 낮은 생산성 등. 태국의 외관은 10년 전이나 30년 전이나 달라지지 않는 것도 문제다. 그러나 동남아시아에서 제일가는 언론자유 수준과 도로 전기 등의 사회간접자본(SOC) 수준도 장점으로 꼽을 만하다. 태국의 정치 상황은 복잡하고 혼탁하지만 그런데도 여러 장점을 가진 태국 경제 환경의 가치는 퇴색하지 않는다.
정호재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방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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