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대통령의 추석 선물

2024. 9. 12.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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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현대 인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브로니슬라브 말리노프스키(1884~1942)를 있게 한 대표작은 역시 1922년에 출판된 『서태평양의 모험가들』이다. 이 책의 출판과 동시에 말리노프스키는 문학에서의 셰익스피어에 비견되었고, 책은 인류학적 현장 연구의 교범이 되었다. 책에서 말리노프스키는 작은 카누에 몸을 싣고 아무 쓸모도 없는 선물을 주고받기 위해 때로는 목숨을 걸고 수백 마일의 거친 파도를 헤쳐나가는 파푸아뉴기니 트로브리안드 군도의 원주민들을 연구했다. 따로 떼어놓고 보면 몇몇의 무모한 모험처럼 보이지만, 트로브리안드의 여러 섬 전체를 놓고 보면 거대한 선물 교환의 네트워크가 존재했다. 원주민들은 선물을 영원히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에 다른 섬에 다시 선물로 주었다. 전체로 보면 붉은 조개로 만든 목걸이는 커다란 시계방향으로 돌고, 그 대가로 주어지는 흰 조개로 만든 팔찌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았다. 긴 시간이 지나면 선물은 최초의 소유자에게 돌아올 것이었다. 실용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무 쓸모도 없는 이 선물을 주고받기 위해 원주민들은 목숨을 걸고 카누에 올랐다.

「 대통령 선물 거부한 야당 의원들
받으면 ‘꿀린다’고 생각했던 걸까
태평양 원주민의 ‘선물 교환’에서
평화와 상호 의존의 정신 배우길

인류학적 현장 연구에는 유독 트로브리안드 군도와 같은 소규모 사회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상대적으로 연구하기 쉬운 소규모 사회를 통해 복잡한 사회적 삶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트로브리안드 군도에 선물 주고받기의 규칙이 있고, 내가 준 선물이 언젠가 다시 나에게 돌아올 수도 있듯이, 복잡한 한국 사회에도 그런 규칙은 있을 것이다.

역대 대통령의 명절 선물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것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멸치라고 할 것이다. 통영의 수산업 갑부였던 그의 부친 고(故) 김홍조 옹은 정치인 아들을 위해 평생 멸치를 후원했다. YS는 수십년간 아버지의 멸치를 선물로 돌렸으니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정치권에서 김홍조 옹의 멸치를 받아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치가 지금처럼 각박해지기 전이기도 했고, 더구나 김홍조 옹은 아들이 대통령이 된 뒤에도 단 한 번도 청와대를 방문하지도 않았을 정도로 엄격하게 처신했다고 하니, 정치 노선이 다르다고 해서 그 지극한 부정(父情)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두 번째 성공 사례라면 노무현 전 대통령을 들 수 있지 않을까. 오늘날 대통령 명절 선물의 공식처럼 된 지역 특산물의 조합을 처음 만들어낸 사람이 노 전 대통령이다. 그는 균형발전위원회를 설치하고 지역의 발전을 대표적인 브랜드로 내세웠으니 이 선물은 받는 이에게 그의 정치철학을 각인시켜주는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그 후 네 명의 대통령들은 같은 방식의 선물을 그저 답습할 뿐이어서 이제 선물은 점점 상품이 되어가고 있고, 대통령의 선물이 당근마켓에 올라와도 전혀 놀랍지 않게 되었다.

말리노프스키 이후 이어진 수많은 후속 연구들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왜 그리고 어떻게 선물을 주고받는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수준 높은 선물이라면 ‘양도할 수 없는 소유’를 주는 것이다. 왕실의 문장이 새겨진 장식품 같은 것이다. 누군가에게 선물로 주었지만 거기에 새겨진 문장으로 상징되는 왕실의 역사와 위엄은 여전히 왕실의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선물은 의미를 가진다. “주었지만 여전히 가지고 있는” 선물이 좋은 선물이 되는 이유이다. YS와 노무현 이후 대통령의 선물이 별로 대접을 못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멸치를 주었지만 부친의 지극한 정은 여전히 YS의 것이었는데, 요즘 대통령의 선물은 그냥 크게 흠 잡히지 않을 특산물일 뿐이기에 쉽게 거절할 수 있다.

대통령의 선물을 거부하고 싶은 야당 의원들의 심정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선물을 받으면 ‘꿀리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류학적 연구에서 선물은 정치적 위계를 동반하는데, 대개는 선물을 주는 사람이 더 높은 지위를 가진다. 그러니 대통령의 선물을 받으면 그 밑으로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할 것 같은 사회적 본능이 살아날 수도 있다. 그러나 더 좋은 대처법은 선물을 받아들이고 그보다 더 신중한 답례품을 줌으로써 내가 더 상위에 자리 잡는 것이다. 상대가 선물에 담아내지 못한 철학과 가치를 나의 답례품에 담아낸다면 단순히 거절하는 것보다 훨씬 멋진 한방이 될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선물은 권력자들의 것이다. 힘 있는 사람들끼리 선물을 주고받고, 더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이 적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더 많이 선물한다. 조개로 만든 목걸이와 팔찌를 독점했던 트로브리안드의 추장들은 숙명처럼 서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여러 섬들의 평화를 지키고 사람들을 조직해 큰 파도 넘어 대양으로 나아가는 책임을 졌다. 명절 선물도 제대로 주고받지 못하는 대통령과 정치인들이 항해를 조직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는 추석 즈음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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