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관계 불만족, 이혼 요구 아내... 재결합 가능할까

김상목 2024. 9. 11.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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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세 가지 색 - 화이트>

[김상목 기자]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평등'에 대한 논란은 한국 사회에서만 격렬한 게 아니다. 기회의 평등이냐 결과의 평등이냐, 분배가 창의와 노력을 가로막진 않느냐 등의 논쟁은 전 세계 공통의 쟁점이다. 이 영화는 바로 그런 평등의 문제를 형상화하려는 시도다.

다국적 커플의 기상천외한 이별과 재회 스토리
 '세 가지 색 - 화이트' 스틸 이미지
ⓒ ㈜스튜디오 산타클로스엔터테인먼트
부부가 법정에서 만난다. 폴란드인 이발사인 '카롤'과 프랑스인 헤어모델 '도미니크'는 헝가리 부다페스트 미용대회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다. 둘은 결혼해 함께 파리에서 지내기로 한다. 하지만 이 부부는 연애 시절에는 상상하지 못한 장벽에 부딪힌다. 도미니크가 카롤과의 부부관계에서 단 한 번도 만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부부생활 불만족을 이유로 도미니크는 이혼 소송을 시작하고, 카롤은 이를 만류하지만, 아내는 요지부동이다. 결국 카롤은 이혼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 외국인인 그는 프랑스 법정에서 소외되고, 마지막으로 아내를 만류하러 간 자리에서 최후의 기회를 얻지만 실패한다.

카롤은 아내에게 이혼당한 데다, 재산도 위자료로 전부 빼앗기고 만다. 빈털터리가 된 그는 당장 하룻밤 잘 곳이 없어 거리를 헤매는 신세로 전락한다. 법원 앞에서 무심코 비둘기 떼 사이로 들어간 그는 프랑스 비둘기에게까지 새똥 세례를 받지만, 어디 항의하거나 화를 풀 데도 없다. 공중전화로 도미니크에게 애원도 해보지만, 야속한 전화기는 카롤의 마지막 재산인 동전까지 먹어버린다. 역사 승무원에게 거칠게 항의하자 승무원은 이거 받고 떨어지라는 시선으로 2프랑 동전을 건넨다. 그는 마지막 재산인 이 동전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간직한다.

알거지로 전락한 카롤은 지하철 역사 내에서 잘하지도 못하는 음악 연주로 잔돈이라도 벌어보려 하지만, 빼어난 미용 솜씨와 달리 그의 연주 실력은 형편없다. 버스킹 아무리 해봐도 하루 잘 곳도 마련할 수 없는 신세다.

그런데 카롤의 폴란드 악곡 연주에 이끌린 '미콜라이'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건네온다. 그리고 여권도 여비도 아무것도 없는 카롤을 자신의 항공편 수화물로 위장해 귀국을 돕는다. 중간에 우여곡절을 겪으며 둘은 헤어지지만, 천신만고 끝에 카롤은 친구 '유렉'의 이발소에 도착해 당분간 신세를 지게 된다.

솜씨 좋은 이발사로 정평이 나 있던 카롤은 유렉과 함께 이발사 일을 재개하고, 돈을 모으기 위해 경호원 일도 겸업한다. 우연한 기회에 일확천금 정보를 얻은 카롤은 운명을 건 도박으로 큰돈을 벌게 된다. 밑천이 생긴 참에 무역회사를 창업한 그는 냉전이 끝나고 동서 교류가 활성화된 기회를 틈타 거부가 된다. 하지만 부와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의 머릿속엔 전처 도미니크뿐이다. 그는 아내와 재회하기 위해 기상천외한 작전을 꾸미기 시작한다.

다국적 커플의 순애보의 이면
 '세 가지 색 - 화이트' 스틸 이미지
ⓒ ㈜스튜디오 산타클로스엔터테인먼트
<세 가지 색> 3부작 중에서 두 번째에 해당하는 <화이트>는 여러모로 연작 가운데 이질적인 질감으로 분류되는 작업이다. 프랑스의 국기 색깔과 그에 얽힌 유래를 이미지로 재현한 3부작 가운데 가장 시사적인 주제를 담당한 <화이트>는 <블루>와 <레드>에 비해 좀 더 주제 의식이 노골적이고, 블랙 코미디 요소를 짙게 드러낸다.

모두 준수한 평가를 받는 3부작 가운데 굳이 따지자면 가장 저평가되는 작품이라 봐도 무방할 테다. 하지만 삼색기를 구성하는 세 가지 색 중 어느 하나도 빼놓을 수 없는 것처럼, 이 작품이 상징하는 '평등'의 문제는 다른 연작들과의 조화를 연상하며 소화할 때 진정한 실체를 파악할 수 있겠다.

영화가 제작될 당시, 동과 서를 분리하던 철의 장막은 활짝 열리고 유례없는 개방이 홍수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폴란드 남자 카롤과 프랑스 여자 도미니크는 헝가리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다. 국적도 배경은 달라도 청춘 남녀는 사랑과 노력만 있다면 어떤 장애물이건 돌파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하지 않았을 테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프랑스에서 함께 살게 되자 카롤은 도미니크를 성적으로 만족시키는 데 아무리 노력해도 실패만 거듭할 뿐이다.

원인을 찾아보려 해도 '고개 숙인 남자' 카롤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지고지순한 순애보를 펼쳐도 성인 남녀의 부부생활에서 이는 치명적인 결함일 수밖에 없다. 결국엔 이혼을 당하는 처지로 추락한다. 가진 것 다 잃은 무일푼에 불어도 서툴다. 그제야 카롤은 가난한 동유럽 이방인의 신세를 절감한다.

사랑하는 아내와 재결합하고 싶다. 어떻게 해야 그 꿈은 이뤄질 수 있을까. 일단 고향에 돌아가 재기해야 하지만 귀국할 길도 막막하다. 기상천외한 귀향은 사람=물건 무게로 대입되는 자본주의 법칙 덕에 가능해진다.

영화는 전혀 낭만적인 판타지를 끌어들이지 않는다. 카롤은 돈을 벌고 성공해야 한다. 불법까진 아니라도 그 경계선의 방도를 활용해 그는 기회를 거머쥐고 목표로 했던 부자가 된다. 그가 성공하자마자 구매한 근사한 차는 바로 (프랑스를 상징하는) '볼보'다. 그는 미용사로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지만, 본업으로는 아무리 애써도 큰돈을 만질 수 없었다. 그가 성공에 이르는 열쇠를 얻은 건 불법적인 거래를 일삼는 브로커의 경호원 일을 통해서였고, 비밀 정보를 통해 부동산 투기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기존 질서가 붕괴하고 홍수처럼 밀려온 자본주의 덕분에 가능했던 상황이다.

목돈을 움켜쥔 카롤은 이제 건실한 사업가로 변신한다. 그가 부를 쌓는 방식은 동유럽과 제3세계에서 수급한 저렴한 상품을 서방에 수출하고, 동유럽에서 생소한 상품을 발 빠르게 유통했기 때문이다. 그는 러시아와 서유럽 중간에 자리한 폴란드의 위치를 적절히 활용해 시세차익으로 큰 이익을 낸다. 제조업이나 전통산업이 아니라 허생전에서처럼 정보와 매점을 통해 신흥 갑부가 줄줄이 등장한 동유럽의 현주소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카롤은 한시도 잊은 적 없었던 도미니크와의 재회를 꿈꾼다. 그는 이제 자신의 능력을 보여줘야 하지만, 전처가 자신이 아니라 재물에만 마음을 쏟을까 두렵기만 하다. 고심 끝에 카롤은 터무니없는 시험을 도미니크에게 적용하기로 한다. 돈이면 다 되는 사회주의 붕괴 직후 동유럽이기에 가능한 작전을 수립한 그는 재결합을 완성하기 위해 특별한 단계를 설정해둔다. 그 단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그저 연인의 사랑싸움으로만 간주한다면 감독의 진정한 의도와는 몇 광년은 될 정도로 동떨어진 해석으로 추락하고 말 테다.

거장의 설계도
▲ "세 가지 색 - 화이트"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스튜디오 산타클로스엔터테인먼트
<세 가지 색> 연작 중에서도 유독 이질적인 작업이긴 하지만, 3편 모두 기본적으로 로맨스 장르의 형태를 지닌 건 동등하다. 다만 <화이트>는 우리가 사랑을 떠올릴 때 피하고 싶어지는 모든 것들을 굳이 다뤄야만 설명 가능한 주제라는 게 근본적인 차이다. 연애 시절 혹은 풋풋하던 청춘 시절의 사랑은 대가나 조건을 굳이 따질 필요가 없다. 사랑의 힘으로 뭐든 돌파할 수 있다고 믿는 순수한 결정체가 반짝반짝 빛나는 것처럼 그려진다.

하지만 나이 먹을 만큼 먹고 결혼을 고민하거나 부부가 된 다음에는 그런 순애보는 더는 불가능해진다. 그 자리를 온갖 세속의 문제들, 일상의 숙제들이 가득 메우게 마련이다. 사랑은 그렇게 식어가기 시작한다. <화이트>는 바로 그런 단계의 이해타산이 결합해야 지속 가능한 사랑을 다뤘다. 구차해 보이고 속물적일 수밖에 없다.

영화의 초반부는 풍요롭고 화려하게 빛나는 '프랑스' 자체라 할 눈부시게 아름다운 도미니크가 가난하고 위축된 촌뜨기 '폴란드'의 상징 카롤을 내치는 이야기다. 사회주의 진영이 무너지고 자유와 풍요를 쫓아 홍수처럼 서쪽으로 향한 동유럽인들은 자신을 제3세계 이주노동자와 매한가지로 취급하는 서유럽에 좌절과 열등감을 느낀다. 카롤의 발기부전은 바로 그런 동구의 신경증을 (꽤나 직설적으로) 은유하는 장치다. 웬만한 노력으론 그 격차는 극복할 수 없다. 카롤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이제 중반부 이후 카롤의 사랑과 복수의 드라마가 펼쳐질 시간이다. 그는 세계화로 전 지구적인 상품 유통과 함께 과거 국가가 모든 걸 독점하던 시대가 무너지고 무주공산의 국부가 널린 사회주의 체제의 허점을 동시에 공략해 졸부가 된다. 어느 시대나 격변기에는 그런 기적 같은 일이 가능한 법이다.

그렇게 소규모의 (구소련 국가에서 공통 등장한 신흥재벌 '올리가르히'처럼) 단시간에 성공한 자본가가 돼서야 비로소 카롤은 도미니크와 재회할 자신감을 얻게 된다. 하지만 돈으로 전처의 마음을 포섭하긴 싫다. 그런 카롤의 '작전'이 후반부를 장식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영화의 말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카롤과 도미니크의 기상천외한 연애담은 절대로 개인 대 개인의 관계가 아니다. 유럽 통합이 진행되던 20세기 말의 유럽 대륙에서 펼쳐지던 혼란과 해결해야 할 숙제를 풀어야만 인류애적인 진정한 통일 유럽이 가능하다는 거장의 유언 같은 호소다. 그런 감독의 의도가 영상 편지처럼 그려지는 거대한 풍경화로 <화이트>를 소화해야만 왜 유독 물과 기름처럼 다른 두 편과 겉도는 이 작업이 필수적인 존재인지 깨닫게 될 테다. 다른 연작과 달리 (감독의 고국인) 폴란드가 프랑스와 함께 주요 배경으로 설정되는 맥락 역시 그런 인식 아래에서 설득력을 가진다.

이 영화가 품은 주제는 1990년대 유럽이 아니라 지금과 근미래 남북한 관계에도 고스란히 통용할 수 있는 맥락으로 다가온다. 평등해야 사랑도 가능하다는, 외면하고 싶지만 우회할 수 없는 난제를 최선의 의도로 풀이한 결과물이 <세 가지 색 – 화이트> 속 우화 같은 이야기로 돌아왔다.

[작품정보]

세 가지 색 - 화이트
Trois Couleurs: Blanc
1994 프랑스 드라마
2024.09.11. (재)개봉 91분 15세 관람가
감독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출연 즈비그니브 자마코브스키(카롤 역), 줄리 델피(도미니크 역),
자누스 가조스(미콜라이 역), 예르지 스투(유렉 역)
수입 ㈜안다미로
제공/배급 ㈜스튜디오 산타클로스엔터테인먼트

44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감독상

출연 즈비그니브 자마코브스키(카롤 역), 줄리 델피(도미니크 역),
자누스 가조스(미콜라이 역), 예르지 스투(유렉 역)
수입 ㈜안다미로
제공/배급 ㈜스튜디오 산타클로스엔터테인먼트

44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감독상
▲ "세 가지 색 - 화이트" 포스터 영화 포스터 이미지
ⓒ ㈜스튜디오 산타클로스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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