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구한 '이 사람', 왜 북한에서 더 유명할까

김종성 2024. 9. 11.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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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티빙 <우씨왕후> 에 등장하는 '을두지'

[김종성 기자]

남한에서는 티빙 사극 <우씨왕후>에 나오는 을파소(김무열 분)가 많이 알려져 있다. 이 드라마 속의 을파소는 우씨왕후(전종서 분)와 고국천태왕(지창욱 분)의 지원하에 개혁정책인 진대법을 밀어붙인다. 지금으로 치면 서민용 곡식 대출법인 진대법에 대해 귀족들은 제동을 걸려 하지만, 을파소는 소신 있게 이를 지켜낸다.

남한 시청자들에게 드라마 속 을파소는 자세히는 몰라도 역사 시간에 들어본 적은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같은 을씨 성을 쓰면서, 북한에서는 을파소보다 더 유명한 또 다른 고구려인이 있다. 그는 한국에서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고구려 재상 을두지다. 그를 을파소만큼 아는 사람은 남한에 많지 않을 것이다.

을두지 익숙한 북한 사람들
 티빙 <우씨왕후> 관련 이미지.
ⓒ 티빙
북한 사람들은 을파소보다는 을두지를 더 많이 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태왕(대무신왕) 편을 읽어보면, 북한 사람들이 을두지를 많이 아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한나라를 계승한 후한이 건국(서기 25)된 뒤에 이 나라의 요동태수가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침공했다. 대무신태왕은 우보(右輔) 송옥구와 좌보 을두지 등을 불러 대책을 강구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한국이나 한성의 한(韓)은 한(汗)이나 칸처럼 군주를 가리키는 칭호였다고 말한다. 한국어 발음 '한'에 맞는 한자를 찾다 보니 한(韓)을 선택하게 됐다. 그래서 이 경우에는 한자의 원뜻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 이렇게 처음에는 군주를 지칭했던 '한'이 나중에 국가를 지칭하게 됐다는 게 신채호의 설명이다.

신채호는 고조선에 신한·말한·불한이라는 세 군주가 있었다면서 그중 부왕(副王) 격인 말한·불한을 음역하면 마한·변한이 되고 의역하면 좌보·우보가 된다고 말했다. 이 설명에 따르면, 좌보와 우보인 을두지와 송옥구는 재상급이기는 하지만 조선시대 재상보다는 위상이 높았다고 볼 수 있다.

침략군을 어떻게 막으면 좋겠느냐는 대무신태왕의 물음에 대해 우보 송옥구는 '험지를 근거로 기병(奇兵)을 활용하자'는 안을 내놓았다. 적이 함락하기 힘든 요새를 지키고 있다가 기습 공격으로 전세를 뒤집자고 건의한 것이다.

좌보 을두지는 신중한 접근법을 추천했다. 그는 작은 나라 군대가 큰 나라 군대와 정면으로 마주하면 패배하기 쉽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성문을 굳게 닫고 버티다가 적이 지쳐 돌아갈 때 공격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대무신태왕은 좌보의 방책을 수용했다. 태왕은 지금의 지린성(길림성) 지안현(집안현)에 있는 위나암성에 들어가 성문을 굳게 닫아 걸었다. 성 밖 평야의 곡식을 치우고 들판을 불사르며 우물을 메워버린 뒤 성으로 들어가는 청야수성(淸野守城)을 택한 것이다.

이로부터 한나라 군대의 봉쇄가 계속됐다. <삼국사기>는 이 봉쇄가 '수십 일' 이어졌다고 말한다. 한나라 군대는 성을 외부와 단절시켜 고구려인들의 힘을 빼는 전술을 구사했다. 성 안의 고구려인들이 음식은 물론이고 식수도 제공받지 못하게 하는 작전을 구사한 것이다.

고구려 수뇌부는 한나라 군대가 지칠 때를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 시점은 오지 않았다. 태왕은 가만히 있다가는 아군이 먼저 지쳐 쓰러지겠다는 생각에 을두지에게 또다시 의견을 물었다.

을두지의 두 번째 계책
 북한 그림책에 나오는 을두지
ⓒ 김경희
을두지는 두 번째 계책을 내놓았다. 그는 "한나라 사람들은 이곳이 암석 지대이니 필시 샘물이 없으리라 생각해 이같이 장시간 포위해 우리의 곤란을 기다리는 모양입니다"라며 작전을 공개했다. 그의 작전은 잉어를 수초(水草)에 싸서 술과 함께 한나라 군사들에게 선물하는 것이었다. 왜 이런 작전을 세웠는지는 고구려 태왕의 사과 편지와 함께 선물을 받아 든 한나라 장군의 반응에서 확인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한나라 장군은 잉어·수초·술로 이뤄진 선물 세트를 보면서 '성안에 식수가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됐다. 이대로 포위하고 있으면 고구려가 절로 붕괴하리라는 판단을 거두게 된다. 봉쇄 정책으로는 항복을 받기 힘들다고 판단한 한나라 측은 고구려 태왕에게 공손한 답장을 보낸 뒤 철군을 단행했다.

북한 정권이 을두지를 영웅화하는 것은 오늘날의 북한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 고구려를 그가 구해냈다는 판단 때문이다. 장기간에 걸친 외세의 봉쇄 속에서도 끝까지 고구려를 지켜내고 한나라를 점잖게 돌려보낸 그의 모습이 오늘날의 북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보는 것이다.

2022년에 <문화·경영·기술> 제2권 제2호에 실린 김경희 가천대 문화유산역사연구소 연구교수의 논문 '북한에서 이루어지는 고구려 인물의 담론 형성 양상 : 을두지를 중심으로'는 "북한 사회에서 고구려 시기 인물 가운데 을두지는 대표성을 지니며 많이 호명되는 인물이다", "북한에서 을두지가 중학교·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 등장하고 그림책 속에서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등등의 설명을 한다.

그런 뒤 을두지의 청야수성전이 북한 사회에서 어떻게 평가되는지를 소개한다. 김경희 논문에 따르면, 2009년에 <천리마> 제11호에 실린 황금석의 '고구려의 군사전법 – 청야수성전'은 "(고구려의) 가장 대표적인 전법이 청야수성전이었다"라며 "청야수성전은 고구려 시기에 창조돼 그 시기는 물론 후세 우리나라 역대 국가들의 반침략투쟁에서 널리 이용된 우수한 전법이었다"고 말한다. 이런 내용을 소개한 뒤 김경희 논문은 "을두지는 고구려를 대표하는 반침략투쟁에서 애국심·슬기·용맹·용감성·자기희생성이 강조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고 설명한다.

북한도 마찬가지이지만 남한에서는 한반도 북부에 살았던 역사적 인물들이 제대로 평가되지 않는다. 광개토태왕이나 을지문덕처럼 태산 같은 업적을 남긴 인물들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을두지처럼 휴전선 건너편에서는 친숙한데도 이쪽에서는 그렇지 않은 인물들이 허다하다. 해당 인물의 후손이나 자료가 남쪽에 없어서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아무래도 분단과 냉전의 영향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우리의 역사 인식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태왕이 포위돼 고구려가 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라를 구한 을두지는 을파소 못지않게 널리 알려져야 할 인물이다. 그런데도 남한에서는 그의 존재가 널리 회자되지 않는다.

위 김경희 논문은 "남한 사회에서는 주로 재상가인 을파소가 교과서와 어린이책에서 유통되고 있다"고 한 뒤 "반면에 북한 사회에서는 병마를 담당하는 을두지 담론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말한다. 분단 시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고대 역사와 관련해서도 분단 상태가 존재하는 셈이다. 을파소도 잘 알고 을두지도 잘 알아야 균형 잡힌 역사 인식이 형성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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