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가 영화인들을 괴롭히는 방법
[원승환]
▲ 2023년 10월 17일 박기용 영화진흥위원장이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서 열린 국정감사에서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한국 영화 진흥을 책임지고 있는 영화진흥위원회가 방향성에 대해서 자체적으로 판단하거나 정하지 못하고 예산 문제 때문에 기재부에서 시키는 대로, 문체부에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이 현실을 몹시 안타깝게 생각하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 자체가 저로서는 정말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 박기용 영화진흥위원장, 2023년 제14차 영화진흥위원회 정기회의 '2024년 기금운용계획(정부안) 보고(현장 보고 안건)' 발언
2023년 5월 26일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는 제10차 정기회의에서 '2024년 영화발전기금운용계획안(이하 영발기금 예산안) 심의·의결의 건'을 원안 의결했다. 영진위가 의결한 2024년 영발기금 예산안은 영화산업 육성 및 지원 860억 원과 영화발전기금 운영비 124억 원 등 1345억 원 규모였다.
2023년 영발기금 예산안은 2300억 원이었는데, 공공자금 관리기금에서 빌린 돈과 이자 비용 809억 원을 뺀 실질 예산은 1490억 원이었다. 이중 영화산업에 지원되는 사업 예산은 729억 원, 영화발전기금 운영비가 121억 원이었다.
영진위가 의결한 2024년 사업 예산 860억 원은 지난해보다 131억 원 증가한 것이었다. 2022년 결산 기준 사업지출 금액인 916억 원보다는 56억 원 줄어든 것이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영화발전기금이 고갈되고 있음을 고려하면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하지만 2024년 영발기금 최종 예산은 영진위가 의결한 예산과 달랐다.
2023년보다 35%나 줄어든 2024년 영화발전기금 지원사업 예산
영화예술의 질적 발전과 한국영화 산업의 진흥·발전을 위해 설치한 영발기금의 예산편성은 정부의 일반적인 예산편성과 같은 일정으로 편성된다. 정부의 예산편성 절차는 '국가재정법'에 규정되어 있는데 절차는 다음과 같다.
①각 부처는 1월 31일까지 기획재정부(이하 기재부)에 중기사업계획서 제출하고, ②기재부는 3월 31일까지 예산편성 지침을 확정하여 각 부처에 통보한다. ③각 부처는 예산요구안 작성하여 5월 31일까지 기재부에 제출하고, ④기재부는 이 요구안을 바탕으로 8월 말까지 정부예산안을 편성한다. ⑤이 정부예산안은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승인하면 9월 2일까지 국회에 제출한다. ⑥국회는 정부가 보낸 예산안을 심의하고 12월 2일까지 본회의에서 의결하여 확정한다. 그리고 국회가 의결한 확정안이 다시 정부로 이송된다.
영진위가 5월 26일 의결한 2024년 예산안은 5월 31일까지 기재부에 제출하게 되어 있는 영진위의 요구안이고, 이 예산요구안은 기재부와 협의·조정을 통해 8월 말에 정부안으로 결정된다. 위에 인용한 박기용 위원장의 발언은 기재부가 조정한 2024년 영발기금 정부예산안을 보고할 때 한 말이다. 영진위에 보고된 2024년 영발기금 정부예산안의 사업 예산은 463억 원으로 영진위 의결예산안에 비해 397억 원이나 줄어든 것이었고, 2023년 사업 예산에 비해서도 265억 원 줄어든 것이었다.
지역영화 생태계 기반 마련 예산과 애니메이션 종합지원 예산이 전액 삭감되고, 영화제 개최지원 예산이 50%, 기획개발 지원 예산이 61.1%, 독립예술영화 제작 지원 예산이 40.3% 삭감된 영발기금 예산안이 바로 이 정부예산안이다.
▲ 2023년 9월 21일 전국 56개 영화제가 연대한 (가칭)국내개최영화제연대가 "2024년 영화제 지원 예산 50% 삭감을 철회하라"고 촉구하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
ⓒ 국내개최영화제연대 |
이어 전국 8개 지역 독립영화협회와 지역 영화단체가 지역영화 생태계를 파괴하는 예산 전액 삭감 결정을 철회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전국 56개 영화제가 연대한 (가칭)국내개최영화제연대도 예산 삭감 철회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런 영화인과 영화단체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난 9월 공개된 2025년 영발기금 예산안에서도 지역영화 지원 예산과 애니메이션 지원 예산은 복원되지 않았고, 영화제 지원 예산은 5억 원 증액에 그쳤다. 영화인들이 간절히 필요하다고 요구했고, 영진위 위원 대다수도 동의하는 사업 예산은 왜 편성되지 못하는 걸까.
지난 8월 1일 조국혁신당 김재원 의원, 더불어민주당 임오경·강유정·조계원 의원과 영화산업 위기극복 영화인연대가 공동주최한 '영화발전기금 2025년 예산안 긴급 점검 토론회'에 참여한 많은 영화인이 가장 궁금해한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영발기금 편성 문제의 답은 위에 인용한 박기용 위원장의 발언에 있다. "한국 영화 진흥을 책임지고 있는 영화진흥위원회가 방향성에 대해서 자체적으로 판단하거나 정하지 못하고 예산 문제 때문에 기재부에서 시키는 대로, 문체부에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한국 영화진흥정책의 현실, 영진위의 현실 때문이다. 하지만 이 현실은 정당하지 않다.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의 진정한 의미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라는 말로 널리 알려진 '팔길이 원칙'은 영국 정부가 1946년 설립하며 천명한 대영예술위원회 운영원칙 중 하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재건 과정에서 영국 정부는 예술과 문화의 부흥이 전후 시민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공동체를 회복하고 사회를 통합하며 경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판단해 세계 최초의 국가 예술지원 기관인 대영예술위원회를 설립했다.
하지만 국가 차원의 문화예술지원이 문화예술에 대한 정부의 부당한 개입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고 독립적인 의사결정 과정과 자율적이고 공정한 운영을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그 고민의 결과가 바로 팔길이 원칙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가 문화예술정책의 기조로 소개하면서 널리 알려졌는데, 그 이후 대부분의 정부는 팔길이 원칙을 문화예술정책의 기본 원칙으로 천명했다. 흔히 정부나 공공기관이 문화예술 행정을 펼칠 때 헌법이 보장하는 예술가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그런 의미만은 아니다.
이는 대영예술위원회의 재정지원에 관한 원칙이다. 정권이 바뀌더라도 문화예술을 위한 재정지원 원칙이 흔들리지 않도록, 정부가 재정지원은 하지만 지원금이 누구에게 어떻게 분배되느냐의 쓰임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고 민간 예술인으로 구성한 위원회에 전적으로 맡긴다는 정치적 합의를 하였고 그 결과를 팔길이 원칙이라 부른다.
국가 문화예술 정책의 방향성과 총재정의 규모는 정부와 문화부처가 결정하지만, 세부적인 예산편성과 집행은 관료가 아니라 현장 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가 자율적으로 편성하고 집행하도록 하는 것이 대영예술위원회 재정지원 정책의 핵심 내용이었다.
영국의 계약법에는 팔길이 계약이라는 개념이 있다. 중세 상법에서 비롯된 것인데, 상업거래가 활발해지면서 도입한 방법이 계약의 당사자가 서로 독립적이고 동등한 위치에서 거래를 진행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거래의 공정성과 신뢰성이 증진되었고 시장에서 공정한 가격이 형성되었으며, 이를 통해 상업이 더욱 발달할 수 있었다.
영국 정부는 국가 재정으로 문화예술을 지원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부당한 영향력을 방지하고 정치적 이해관계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국가와 예술기관 간의 신뢰 확보와 독립성 보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예술기관이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문화예술 지원할 수 있도록 당사자가 독립적이고 동등한 위치가 되는 팔길이 계약을 예술기관의 재정지원 원칙으로 도입하였다.
▲ 영화진흥위원회 |
ⓒ 성하훈 |
영진위는 직접 관리·운용하며 독립된 회계처리를 하는 영화진흥금고를 재원으로 한다. 영화진흥금고는 2007년 영화발전기금으로 개편되었고, 기금의 관리·운용은 여전히 영진위가 담당하게 하였다. 정부로부터 직무상 독립이 보장된 위원이 구성한 민간위원회가 기금이라는 정부 예산으로부터 독립된 재원을 관리·운용하는 한국판 팔길이 원칙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국가재정은 재정 운용 수단에 따라 예산과 기금으로 구분한다. 예산은 조세수입을 주요 재원으로 하여 국가의 일반적인 지출에 충당하기 위해 설치하는 일반회계와 국가가 특정 사업을 운영하고자 하거나 특정 자금을 보유하여 운용하고자 할 때 특정한 세입으로 특정한 세출에 충당하는 특별회계로 구분한다.
기금은 국가가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특정한 자금을 신축적으로 운용할 필요가 있을 때 법률로 설치하는 것으로, 조세수입보다는 출연금·부담금 등을 재원으로 한다. 기금은 특정 목적의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수입과 지출의 연계가 강하게 나타나며, 집행에 있어서는 예산보다 더 많은 자율성과 탄력성이 허용된다.
영발기금은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이하 영화비디오법)에 따라 설치된 기금으로, 정부의 출연금과 영화관입장권의 부담금 등을 주요 재원으로 조성하여 한국영화진흥을 위해 사용해 왔다.
'국가재정법'은 정부가 예산을 편성하는 일반회계나 특별회계예산과 달리, 기금은 기금관리주체가 계획안을 수립하고 기재부와 협의·조정하도록 정하고 있다. 영발기금의 기금관리주체는 영진위다. '국가재정법' 제65조와 제66조에 따르면 기금관리주체인 영진위가 영발기금의 기금운용계획안을 수립하고 기재부 장관에게 제출해야 한다.
하지만 '영화비디오법'과 시행령은 영진위가 영발기금의 운용계획안을 문체부 장관의 승인을 받도록 하여, 기금관리와 운용의 결정 과정에 문체부와 기재부가 모두 간섭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라는 영국의 예술위원회 재정지원 원칙과, '지원하니 이중으로 간섭하겠다'라는 한국의 영진위 재정지원 원칙은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 팔길이 원칙은 선언적으로만 존재할 뿐 실제로 적용되지는 않는다. 이는 영화진흥정책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심각하게 침해한다.
문화예술 재정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는 정부의 재정지원으로 문화예술지원기관의 목줄을 쥐고 이른바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문화예술인을 사찰·감시·검열·배제·통제·차별한 위헌적이고 위법·부당한 국가범죄였다.
블랙리스트 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재정지원을 빌미로 문화예술정책에 부당하게 개입하는 정부의 위헌 행위를 통제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시작해야 할 것은 재정지원의 원칙을 다시 설계하는 것이다.
영국 정부가 문화예술을 지원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정부의 부당한 영향력을 방지하고 재정지원이 정치적 이해관계의 영향을 받지 않게 하려고 팔길이 원칙을 도입하여 국가와 예술기관 간의 신뢰 확보와 독립성을 보장한 것처럼, 우리나라도 정부와 문화예술지원기관 양 당사자가 서로 독립적이고 동등한 위치에서 거래를 진행하도록 해야 한다.
국가재정법 등 관련 법제를 개정하여 기금운용주체가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세부적인 예산편성과 집행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이런 변화가 있지 않는 이상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재발 방지 약속은 지킬 수 없는 허언에 불과할 뿐이다. 팔길이 원칙이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는 국가재정 제도의 정비가 절실히 필요하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원승환 인디스페이스 관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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