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날 돌아가신 독립운동가들의 마지막

정만진 2024. 9. 11.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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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립운동가 (1)

[정만진 기자]

 (사진, 왼쪽부터)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요인 윤현진 지사, 조선국권회복단 교통부장 박영모 지사, 소련에 총살 당한 김만겸 지사, 평양 교외에서 일본경찰과 총격전 중 전사한 허영진 지사. 네 분은 모두 연도는 다르지만 추석날 별세했다.
ⓒ 국가보훈부
흔히들 "추석 연휴"라 한다. '추석'보다 '연휴'에 방점을 찍은 듯한 표현이다. 추석을 단순히 쉬는 날로만 여기는 경향은 점점 심해지고 있다. 하지만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로 대변되는 추석을 거저 생긴 것으로 알아서는 안 된다. 나라와 민족의 존립을 위해 싸우다가 추석날 타계한 독립지사들의 면면을 알아본다.
상해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요인 윤현진 독립지사는 <운수 좋은 날>의 소설가 현진건 집안에 장가들었다. 동생 윤덕경의 남편이 현진건의 형 현정건 독립지사였다. 그러나 윤 지사는 여동생이 혼인한 지 2년 만에 타계했다. 건강도 살피지 않고 너무나 정성으로 일하다가 병을 얻어 불과 29세에 세상을 떠났다. 1921년 9월 16일, 추석이었다.
 윤현진 지사 기념비와 흉상, 경남 양산시 충렬로 27(춘추공원) 소재
ⓒ 국가보훈부
조선국권회복단 교통부장(요즘 표현으로 조직관리부장)을 맡아 활동한 박영모 독립지사도 추석날인 1938년 10월 8일 타계했다. 조선국권회복단은 대구 앞산 안일암에서 결성된 비밀결사로, 그 후 달성토성에서 광복회로 확대 개편되었다. 광복회는 제5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정 국사 교과서가 "1910년대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을 한 독립운동단체는 광복회였다"라고 평가한 무장항일결사였다.

일본군과 교전 중 추석날 전사한 김준길 의병장

나라가 망하기 전에는 독립운동가를 '의병'이라 했다. 1909년 9월 18일 전남 여수에서 39세 김준길 의병장이 일본군과 교전 중 순국했다. 그날 역시 추석이었다. 그 무렵 일본은 의병항쟁 진압을 위해 12만이나 되는 군대를 투입했었다. 1907년 군대해산 이후 경술국치까지 일본군과 의병 사이에는 전투가 5000여 회나 벌어졌다. 추석날도 예외가 아니었다.
 (왼쪽) 조선국권회복단이 결성된 대구 앞산 안일사 (오른쪽) 광복회가 결성된 대구 달성토성. 안일사에는 조선국권회복단 결성지 표지판이 세워져 있지만, 달성토성에는 아무 것도 없다. 심지어 국가사적지인 달성토성 안에는 테니스장이 조성되어 있다.
ⓒ 정만진
충남 청양에서 3·1운동을 일으킨 임상덕 지사가 1919년 10월 8일 세상을 떠났다. 그 날도 추석이었다. 고향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임 지사는 고문을 당한 끝에 순국했다. 1919년 3월부터 5월 세 달 동안 하루 평균 82명이 목숨을 잃었다(총 7500명). 3·1운동은 평화시위로 출발했지만, 일제는 총칼과 고문으로 무자비하게 살상했다.

악랄한 고문으로 추석날 순국한 임상덕·이필발 지사

경북 영덕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다 일제에 체포된 이필발 지사도 고문으로 생명을 잃었다. 1923년 9월 25일, 추석이었다. 2년 6개월 옥고를 치르고 풀려난 지 불과 두 달 만이었다. 아직 33세의 젊은 나이였지만 감옥에서 당한 악랄한 고문의 후유증을 이겨낼 수 없었다.

현진건 소설가의 형 현정건 독립지사도 출옥 여섯 달 만에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일제는 고문으로 사람을 거의 죽게 만든 뒤 병으로 세상을 떠난 양 위장하는 잔꾀를 부렸다. 의열단 창단 주역인 대구의 이종암 지사도 그런 사례였다. 일제는 무지한 고문으로 이종암 지사가 거의 절명 상태에 빠지자 가석방을 했다. 이 지사는 남산동 형(이종윤) 집으로 보내져 열흘 만에 순국했다.
 박영모, 유한종 지사 관련 독립운동 자료
ⓒ 국가보훈부
스물한 번째 추석날 순국한 방병걸·정성수 지사

추석날인 1920년 9월 26일, 방병걸 지사가 21세 나이에 만주에서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추석날인 1921년 9월 16일, 허영진 지사가 29세 나이에 평양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던 중 전사했다. 추석날인 1923년 9월 25일, 공주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던 노규현 지사가 세상을 떠났다.

추석날인 1935년 9월 12일, 진주고보 학생으로서 독립운동을 해온 정성수 지사가 21세 나이로 순국했다. 추석날인 1938년 10월 8일, 두만강 건너편에서 일제에 맞서 싸워온 52세 김만겸 지사가 러시아 군대에 의해 간첩 혐의로 처형되었다. 추석날인 1941년 10월 5일, 경기도 진위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던 유한종 지사가 44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방병걸, 김만겸 지사 관련 독립운동 자료
ⓒ 국가보훈부
독립 이후에도 추석날 옥사한 이상조 지사

심지어는 독립을 되찾은 뒤인 1945년 9월 20일 추석날에도 독립지사는 풀려나지 못한 채 옥사했다. 이상조 지사는 동경 유학 때 졸업 후 조국에 학교를 세워 애국청년을 양성하고 군자금을 모아 국외에 보내기로 결의했다. 그래서 재학 중에도, 졸업 후에도 일본과 국내에서 지하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던 중 1944년 1월 부산에서 체포되어 일본으로 압송되었다. 일제는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을 적용해 3년형을 언도했다. 이 지사는 모진 고문과 비인간적 옥고를 겪던 중 1945년 8월 15일 독립을 맞았지만, 감옥이 일본에 있었던 탓에 풀려나지 못하고 여전히 갇힌 채 9월 20일 옥사하고 말았다.

추석은 그저 '노는 날'만은 아니다

이상조 지사는 나라와 겨레가 자주독립을 회복했다는 사실을 알기는 알았을까? 아니, 윤현진, 박영모, 김준길, 임상덕, 이필발, 방병걸, 허영진, 노규현, 정성수, 김만겸, 유한종 등 독립 이전의 추석날에 세상을 떠난 독립지사들은 하늘에서나마 조국광복 소식을 들었을까?

추석날에도 독립운동가들은 목숨을 바쳐 외세와 싸웠다. 1925년작 박화성 단편소설 <추석 전야>가 극명하게 증언했지만 그 100년 후인 오늘날도 추석날조차 일해야 먹고살 수 있는 국민들은 허다하다. 추석을 그저 '노는 날'로만 아는 요즘 세태는 뭔가 문제인 듯 여겨져 이 글을 쓴다.

덧붙이는 글 |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이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달마다 발표하고 있습니다. 독립유공자가 1만 8139명 되신다는 사실(2024년 9월 11일 현재)을 감안할 때 너무나 느리다 싶습니다. 그래서 역량부족이지만 가능한 만큼 부지런히 독립지사님들을 현창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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