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일easy] 정기선사들의 패싸움, 얼라이언스
"덩치 키워야 생존"…선사들의 치열한 합종연횡
산업계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혹은 필연적으로 등장한 이슈의 전후사정을 살펴봅니다. 특정 산업 분야의 직‧간접적 이해관계자나 소액주주, 혹은 산업에 관심이 많은 일반 독자들을 위해 데일리안 산업부 기자들이 대신 공부해 쉽게 풀어드립니다.
#포지티브적 해석 : 덩치 큰 놈이 이기는 판에서, 덩치를 못 키우면 뭉쳐야 산다.
#네거티브적 해석 : 뭉쳐서 덩치 커지면 운임 올리기, 그 와중에 작은 놈은 찬밥 취급.
국내 최대 정기선사 HMM이 지난 10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프리미어 얼라이언스(Premier Alliance)’ 구성을 발표했습니다. 기존 ‘디 얼라이언스(THE Alliance)’에서 전환된 신규 협력 체제라고 합니다.
‘프리미어’라는 이름이 붙어 좀 더 좋아진 것 같지만, 사실 무리 내 우두머리가 빠지면서 세력이 약화된 얼라이언스입니다. 그 때문에 HMM을 보는 투자자들의 우려가 커지자 기자들을 모아 해명에 나선 것입니다.
이런 호들갑이 이해가 되는 건, 얼라이언스가 컨테이너선을 운항하는 해운업체인 정기선사들에 매우 중요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약육강식의 글로벌 시장에서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는 울타리죠.
항공 얼라이언스에 비유하면 이해가 좀 쉬울 것 같습니다. 미국이나 유럽을 여행할 때 대한항공에서 티켓을 구매해 델타항공 여객기를 이용하거나, 아시아나항공에서 티켓을 사서 루프트한자 여객기를 탄 경험이 있는 분이 계실 겁니다. 대한항공과 델타항공은 ‘스카이팀’, 아시아나항공과 루프트한자는 ‘스타 얼라이언스’로 묶여있어서 그렇습니다.
같은 얼라이언스에 속한 항공사들은 서로 항로나 좌석을 공유(코드셰어)하거나 발권을 공동으로 하고, 마일리지를 상호 적립해주는 식으로 협업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서비스항로 범위를 넓히고, 빈 좌석을 서로 채워주는 역할을 하죠.
정기선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정기선사들이 운항하는 컨테이너선은 스케줄에 맞춰 정기적으로 세계 주요 항만을 기항하며 화물을 싣고 내립니다. ‘정기선사’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한 곳의 항만에 모든 화물을 쏟아 붓는 게 아니라 컨테이너별로 운송을 위탁한 화주별로 선적항과 하역항이 다릅니다. A-B-C-D-E-F 순으로 기항하는 항로에서 A항에서 선적해 D항에서 하역하는 컨테이너가 있는가 하면 C항에서 선적해 F항에서 하역하는 화물도 있습니다. 승객별로 타고 내리는 정류장이 다른 노선버스와 비슷합니다.
이런 특성상 정기선사들은 다양한 노선을 운항해야 많은 화주를 끌어 모을 수 있습니다. 화주 입장에서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능하면 빠르게 화물을 보낼 수 있는 선사를 더 선호하는 게 인지상정이겠죠. 또, 화물이 많든 적든 지정된 항로는 운항을 해야 하기 때문에 수익을 내려면 선복을 최대한 채워야 합니다. 노선이 다양하려면 다수의 선박을 보유해야 하고, 결국 덩치 큰 놈이 이기는 판입니다.
하지만 척당 수천억원씩 하고, 건조에 2~3년씩 걸리는 대형 컨테이너선을 단기간 내에 다수 확보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해운업은 시황 사이클을 타는 업종이라, 호황이라고 무리해서 선박을 대량 발주했다가 인도 시점에 시황이 꺾이면 정기선사는 문을 닫아야 합니다.
그래서 등장한 게 얼라이언스입니다. 선사들끼리 뭉쳐 서비스 노선을 늘리고, 영업망도 공유해 빈 선복(화물 적재 공간)을 서로 채워주는 거죠.
그런데 이 얼라이언스라는 것도 명칭만큼 의리로 다져진 조직은 아닙니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 뭉친 만큼, 필요가 없어지면 등을 돌리게 마련입니다.
덩치를 키우는 게 얼라이언스의 목적인만큼 얼라이언스 내에서도 덩치 큰 선사가 갑입니다. 다들 덩치 큰 선사와 얼라이언스를 맺으려 하고, 덩치가 작은 선사는 찬밥 취급을 받습니다.
세계 양대 선사인 MSC와 머스크(일론 머스크와는 무관한 덴마크 선사입니다)는 정기선 업계에서 ‘갑 오브 갑’입니다. 둘이 합해 전세계 컨테이너 선복량의 35% 가량을 차지하는 두 선사는 사실 ‘얼라이언스의 일원’보다는 ‘얼라이언스의 공공의 적’ 개념이었습니다.
애초에 얼라이언스 결성 자체가 이들 두 거인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들 입장에서도 단독으로 웬만한 얼라이얼스를 넘어서는 덩치를 지녔는데 굳이 동맹을 만들어 보조를 맞추는 번거로운 일을 할 이유도 없었죠.
이들보다 아래에 있는 ‘준척급’ 선사들, 이를테면 CMA CGM이나, 코스코(COSCO), 하팍로이드, 에버그린 등이 얼라이언스의 주축이 될 만한 위치였습니다. 한때 세계 4위였던 한진해운과 HMM의 전신인 현대상선도 얼라이언스 내에서 힘 좀 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수없이 많은 얼라이언스들이 탄생하고 사라졌습니다.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합종연횡을 거듭한 것이죠. 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시작된 고유가와 물동량 감소가 2010년대 중반까지 이어지면서 글로벌 정기선 시장도 큰 변화를 맞습니다. 한진해운을 비롯한 여러 선사들이 파산하거나 흡수합병되고, 얼라이언스 구도에도 여러 변화가 생깁니다.
당시 한진해운이 속했던 CKYHE 얼라이언스는 파산 위기를 맞은 한진해운을 가차 없이 쫓아냈습니다. 다같이 어려운 마당에 난파선까지 끌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무조건 비정하다고 욕할 수도 없는 노릇이죠.
불황이 장기화되자 독야청청하던 MSC와 머스크도 손을 잡았습니다. 치사하게 세계 3위였던 CMA CGM까지 꼬드겨 ‘빅3’만 살아남는 그림을 그리다가, 중국 상무부의 반대에 부딪쳐 1, 2위로만 2M이라는 얼라이언스를 결성한 것이죠.
당시 현대상선도 2M에 끼워달라고 열심히 읍소했지만 얼라이언스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진 못했습니다. 대신 2M과의 전략적 협력 관계라는, 이른바 ‘깍두기’ 신분에 만족해야 했죠. 전성기 때도 MSC, 머스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준은 아니었는데, 유동성 위기를 겪으며 덩치가 크게 줄어든 처지에 ‘겸상’까지 바라는 건 무리였나 봅니다. 사명을 진작 HMM으로 바꿨다면, M이 두 개나 들어가는 명칭이니 2M에 끼워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런데, 이 2M 체제도 오래 가지 못합니다. 둘 다 너무 덩치가 큰 게 문제였습니다. 둘의 점유율이 35%에 육박하면서 독과점 제재에 직면하게 됐습니다. 현재의 맹주 MSC와 과거의 맹주 머스크(2021년까지는 부동의 1위였던)가 한 지붕 밑에서 사는 게 쉽지 않았는지 둘 사이가 썩 좋지 못했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어쨌든 둘은 갈라서기로 했습니다.
머스크는 2M 결성 때까지만 해도 한수 아래였다가 지금은 머리 위로 올라온 MSC 대신, 더 만만하지만 어느 정도 덩치는 갖춘 세계 5위 선사 하팍로이드를 꼬드겨 ‘제미나이’라는 새 살림을 차리기로 했습니다. 머스크와 하팍로이드의 결합은 독과점에도 걸리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하팍로이드가 원래 보금자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2M에 깍두기 신세로 끼어 있던 HMM은 제대로 된 얼라이언스의 일원이 되기 위해 이곳저곳의 문을 두드린 끝에 2019년 하팍로이드와 ONE, 양밍으로 구성된 ‘디 얼라이언스’에 합류해 지금까지 함께 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심 역할을 하던 하팍로이드가 머스크 형님의 한마디에 홀랑 넘어가 동맹을 내팽개친 것입니다. ‘덩치 큰 놈이 갑’이라는 이 바닥의 생리가 실감나는 대목입니다.
세계 선복량의 7%가량을 점유한 하팍로이드가 빠지면 디 얼라이언스의 위상은 초라해집니다. ONE가 6%대 점유율로 하팍로이드에 이어 세계 6위 선사로 자리해 있지만, 사실 이 선사의 정체는 해운 불황으로 위기에 몰린 일본 3대선사(NYK, MOL, K-Line)가 정기선 부문을 분리‧통합해 만든 연합체입니다. 양밍은 HMM보다 순위가 밀리는 세계 9위입니다. 일일이 쪼개면 세계 10위 언저리에 옹기종기 모인 선사들의 집합체가 되는 셈이죠.
여기까지가 HMM이 ‘프리미어 얼라이언스’ 출범을 발표하기 이전의 상황입니다. ‘프리미어’라는 명칭이 지금의 처지보다는 미래의 희망사항을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을 감출 수 없군요.
HMM은 기자들에게 집 나간 하팍로이드 대신 거물급을 모셔왔다고 강조했습니다. 바로 하팍로이드를 데려간 머스크와 갈라선 세계 최대 선사 MSC입니다.
물론 MSC가 HMM‧ONE‧양밍과 ‘겸상’을 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울타리 밖에서 프리미어 얼라이언스와 북유럽 및 지중해 항로에서의 선복교환 협력을 하기로 했습니다.
기왕 손을 잡을 것이라면 MSC가 프리미어 얼라이언스에 합류하는 게 모양새가 좋을 뻔했지만, 그렇게 되면 또다시 독과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하팍로이드가 빠지면서 규모가 줄었다 해도 남은 3사의 선복을 더하면 점유율이 10% 이상이고, MSC가 가진 20%에 육박하는 선복을 더하면 전체 점유율 30%를 넘어서게 됩니다.
규제 기준이 명확한 건 아니지만 ‘단독사냥’도 충분히 할 수 있는 MSC가 굳이 ‘무리사냥’에 합류하기 위해 위험부담을 짊어질 이유는 없었던 듯합니다.
이유 불문하고 HMM이 몸담은 얼라이언스만 놓고 보면 규모가 축소된 것은 분명합니다. MSC와의 협력은 얼라이언스 멤버간 관계보다는 느슨한 형태라는 한계가 있습니다. 협력기간도 프리미어 얼라이언스가 내년 2월부터 5년간인 반면, MSC와는 같은 시점부터 4년간으로 1년 짧습니다.
협력 기간이 종료되면 MSC 없이 3사로만 생존을 모색해야 할 수도 있고, 그마저 뿔뿔이 흩어질 수도 있습니다. 극단적으로는 MSC가 얼라이언스 안으로 들어오고 독과점 규제를 피하기 위해 기존 멤버 하나를 내쫓는 시나리오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나와야 할 얘기가 ‘덩치 큰 놈이 갑’이라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HMM이 덩치를 키우고 경쟁력을 확보해 놔야만 또다시 합종연횡이 벌어지더라도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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