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사과받고 싶었구나!

2024. 9. 11.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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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드라마 보셨어요? 조정을 많이 하더라고요. 가운데 앉아 있는 사람이 조정위원 맞죠?" "드라마 보다가 네 생각이 나서 연락했어." 요즘 자주 듣는 말이다.

현실의 조정에서는 상대방이 90도로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드라마틱한 일은 잘 일어나지 않지만, 그만큼 조정위원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사과받고 싶은 마음에 공감하고 대안을 제시한 것만으로 완강했던 원고의 입장이 누그러져 조정이 잘됐다.

만약 둘 다 그럴 생각이 없다면? 조정위원과 같은 중재자를 찾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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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지현 대전고법 상임조정위원장


“그 드라마 보셨어요? 조정을 많이 하더라고요. 가운데 앉아 있는 사람이 조정위원 맞죠?” “드라마 보다가 네 생각이 나서 연락했어.” 요즘 자주 듣는 말이다. 알고 보니 이혼 전문 변호사들이 주인공인 법정 드라마가 인기라고 한다. 이혼 조정 장면이 많이 등장한 덕분에 조정위원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게 된 사람이 많아진 것 같다. 현직 변호사가 작가라 그런지 재판 사례들도 현실감이 넘치고, 로펌 변호사들의 생활도 잘 그려낸 것 같아 즐겨 보게 됐다. 주인공 변호사의 대사 중 유독 기억에 남는 내용이 있다.

“사과받고 싶었구나!” 유부남과 부정행위를 저지른 불륜녀를 변호하던 주인공이 상대방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사과라는 점을 깨달으며 내뱉은 말이다. 그래서 자신이 피해자라며 원고를 부부 사기단으로 몰아붙이는 뻔뻔한 불륜녀에게 사과하라고 설득한다. 불륜녀가 조정실에서 90도로 고개 숙이며 사과하자 원고는 즉시 아무 조건 없이 소송을 취하해 주며 사건이 마무리된다.

현실의 조정에서는 상대방이 90도로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드라마틱한 일은 잘 일어나지 않지만, 그만큼 조정위원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얼마 전 조정실에서 믿었던 지인에게 큰돈을 투자했다 돌려받지 못해 소송을 건 원고를 만났다. 투자 원금과 매월 약속했던 수익금을 모두 줘야 한다는 원고의 주장에 대해 1심 판사는 원금과 이자는 인정하지만 수익금은 인정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원고는 말도 안 되는 판결이라며 항소했고, 항소심 판사는 먼저 조정을 해보라고 사건을 조정센터로 보냈다.

“저 돈 많습니다. 이 돈 안 받아도 사는 데 아무 문제 없어요. 처음에 상대방이 젊고 사업 경험도 없어서 투자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매달 수익금을 꼭 준다는 약속을 얼마나 찰떡같이 하던지! 더 기가 막힌 건 한 번 죄송하다는 말도 없었다는 겁니다. 오늘도 나와서 사과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답변도 전부 거짓말이에요.”

“네. 배신감이 컸겠군요. 재판을 하다 보면 본능적으로 자기방어를 하고, 재판이 길어질수록 자기 논리가 강화돼 점점 화해하기 어려워지지요. 선생님이 사과받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지금 재판한 지 1년이 넘었고, 1심 판결을 받았는데도 아직 원금조차 못 받고 계시지 않습니까? 돈을 받으려고 한 것이지 서로 싸우자고 재판을 거신 건 아니겠지요.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하시되 이번에도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항소심에서 이긴 것과 마찬가지로 위약금 조항을 걸어 놓으면 어떨까요?”

“항소심에서 이긴 것과 마찬가지란 게 무슨 뜻이죠? 그리고 저 사람을 어떻게 믿고 합의를 하죠?” “통계적으로 재판에 이기더라도 상대방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 강제집행을 하는 비율이 50% 정도지만 조정을 하면 10% 정도까지 떨어집니다. 약속했기 때문에 스스로 이행을 하는 것이지요. 만약 운 나쁘게 상대방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10%에 해당되더라도 위약금 조항을 걸어 놓았기 때문에 항소심에서 이긴 것과 마찬가지로 위약금에 대해 바로 강제집행을 하실 수 있습니다.”

사과받고 싶은 마음에 공감하고 대안을 제시한 것만으로 완강했던 원고의 입장이 누그러져 조정이 잘됐다. 갈등이 복잡하고 풀기 어려울수록 한번 끝까지 가보자는 마음이 들기 쉽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 먼저 진솔한 모습으로 다가간다면 상대방도 그동안 쌓아 왔던 방어용 성벽을 허물고 한 발짝 더 다가올 것이다. 만약 둘 다 그럴 생각이 없다면? 조정위원과 같은 중재자를 찾아가자. 사과받고 싶었던 자신의 마음을 공감받고, 상대방 욕이라도 실컷 하다 보면 어느새 손 내밀 용기가 생겨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안지현 대전고법 상임조정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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