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영 스님의 마음 읽기] 이웃 종교의 순례길에서 ‘비움’을 배우다

2024. 9. 11.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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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 청룡암 주지

계절의 변화는 참으로 오묘하면서 무상함을 깨닫게 해준다. 그토록 애절하게 울부짖던 매미 울음소리가 잦아들더니 이젠 그 소리를 귀뚜라미가 대신한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무더위와 열대야도 조금씩 다가오는 조석 찬바람에 기세가 꺾였는지 온순해졌다. 겹친 여름 자락과 가을 자락이 서툰 바느질로 금세라도 풀릴 것 같은 모양새다. 그렇다. 간절기이다.

이번 간절기 중 열흘을 종단 교육원에서 주관한 서유럽 4개국 순례에 할애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불편함도 반복되어 익숙해지면 편안함으로 뇌가 인지한다. 대부분 승려의 일상이 그럴 것이다. 겉으로는 아닌 척하지만 작은 변화에도 민감한 게 사실이다. 하루살이의 삶이라는 각오로 살아가는 수행자인 나는 두 번의 고심과 번복으로 하늘길에 오를 수 있었다. 칸트의 시간과 맞바꾼 셈이다.

「 고심 끝에 떠난 서유럽 순례길
종교 구분 넘어선 평화 되새겨
매너리즘 빠진 나를 비우게 돼

뭐든 쌓아두는 것을 경계한다. 마음이든 물건이든 제때 놓지 못하게 되면 집착이 되고, 결국 망상과 번뇌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기 때문이다. 해묵은 감정은 해묵은 쌀처럼 향기롭지 못하다. 그래서 이번 4개국 서유럽 순례의 화두를 ‘비움’으로 정했다. 돌이켜보면 멈춰야 할 때 멈추지 못했고, 다가서야 할 때 다가서지 못했던 날들이 많았다. 익숙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태함과 소심함이다. 이것도 내가 버려야 할 하나의 과제였다.

순례를 주관한 교육원 관계자를 포함하여 70여 명 순례자의 첫 도착지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이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대관식을 위해 지어진 성당이다. 비록 대관식은 열리지 못했다지만, 고딕 양식 건축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에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순례자들은 길 위에서 뜻밖의 손님을 맞이하였다. 이제 갓 결혼식을 마친 독일인 신랑 신부로부터 즉석 하객이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이다. 웨딩드레스에 꽃을 든 신부와 깔끔하게 턱시도를 한 신랑이 정중하게 합장하며 사진 촬영을 청하는데, 눈빛과 표정만으로도 존중이 느껴졌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종교의 구분을 넘어 기쁨을 함께하려는 그들에게 펼쳐질 인생 2막의 출발에 스님들은 흔쾌히 ‘길 위의 하객’으로 변신하였고, 나는 자청해서 사진사가 되어 카메라 셔터를 누르면서 그들의 무탈과 평온의 씨앗을 렌즈에 심었다.

4개국 순례 중 일정에 변수가 생겨 들르지 못한 곳이 스위스 베른 대성당이다. 하지만 그 아쉬움은 “안녕하세요, 스님” 또박또박 우리말과 함께 공손하게 합장하는 스위스인으로부터 받은 감동의 인사로 대신할 수 있었다. 이국의 현지인에게 듣는 우리말이 반가우면서 한층 높아진 우리나라의 국격을 실감할 수 있었다. 물론 한류의 열풍을 일으키게 해준 우리나라 문화 예술계의 부단한 도전과 노력의 결과물이라 하겠다.

스위스와 남프랑스를 거쳐 드디어 이번 순례의 종착지인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로마 제국으로부터 시작된 가톨릭 교회 역사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이탈리아 성지순례 중 뇌리에 깊게 박혔던 곳이 순교자들의 지하 묘지 ‘카타콤베’이다. 죽음이라는 극한의 두려움마저도 막지 못했던 그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통해 딜레마와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나를 ‘비움’으로 리셋할 수 있었다.

순례를 떠나기 불과 나흘 전 일이다. 12년을 진행했던 주말 아침 라디오 음악프로그램의 하차를 결정했다. 마지막 녹음을 마쳤을 때의 마음은 홀가분함과 서운함의 교차보다는 오랜 시간을 지속했던 내 일상의 한 부분이 통째로 사라져버린 허망함이었다. 하지만 이번 순례를 통해 배운 것은 지속하지 못함에서 비롯된 허망함을 벗어난 숭고함이다. 그 숭고함은 바로 비움에서 나온다는 것을. 찬트(성가)가 울려 퍼지는 피렌체 대성당에서 나는 성심을 다하여 이웃 종교 하느님께 기도했다. 거창하게 지구촌의 화합과 세계평화를 염원하는 기도가 아닌 내가 기억하고 함께하는 모든 이가 덜 고통받는 가운데 평온에 이르게 해달라는 기도였다.

부드러운 친절과 자비심을 베푸는 것이 그대로 자신의 종교라고 달라이 라마는 역설했다. “이것이 나의 소박한 종교입니다. 복잡한 철학들이나 교회, 절간, 성당 같은 것이 필요 없습니다. 자기의 머리, 자기의 심장이 곧 교회요, 절간이요, 성당입니다. 철학은 친절입니다.”

여기에서 친절은 가장 보편적인 인간의 양심 중 하나이다. 철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게 무엇인가. 인간의 행복이다. 내 것만을 고집하기 때문에 이기심으로 남을 존중하기는커녕 친절과 자비를 베풀지 못하는 것이다. 홀로 행복할 수 있을까.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무거웠던 머리가 한결 가벼워졌다.

단언컨대 ‘구원’의 동의어는 ‘평온’이다. 그 평온을 위해 우리는 하나라도 더 채우려는 마음보다는 하나라도 더 비우려는 마음이 필요하겠다.

원영 청룡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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