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고은의 모서리를 접는 마음] 에테르니스를 위한 의자

2024. 9. 11.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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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고은 소설가

모임이 끝나면 나는 최대한 느리게 테이블을 떠나는 사람이다. 혹은 다시 돌아보는 사람이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떠난 뒤의 테이블을 사진으로 남기는 게 습관이 됐다. 사용한 식기와 냅킨이 그대로 있는 자리, 아직 식지 않은 타이밍을. 타인의 얼굴을 찍는 게 조심스러운 시대에 선택한 나름의 기록방식이지만, 이 행위의 기저에는 일종의 슬픔이 있는 것 같다. 존 케닉의 『슬픔에 이름 붙이기』에 따르면 ‘에테르니스(etherness)’라고 부르는 감정이.

내가 진행하는 라디오를 통해서 알게 된 후 주변에 선물까지 해놓고 정작 나는 제대로 읽지 않았던 책인데, 뒤늦게 거기서 이 단어를 발견하고 쾌감을 느꼈다. 요약하기 힘든 감정을 정확히 호명하는 말을 만났을 때의 개운함이랄까. 책에 따르면 ‘에테르니스’는 휘발성이 담긴 단어 ‘에테르(ether)’와 단란함을 뜻하는 ‘투게더니스(togetherness)’를 합친 신조어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간을 둘러보고는 그곳이 지금은 온기와 웃음소리로 가득하다는 걸 너무 잘 알면서도 그것이 언제까지나 지속되진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느끼는 아쉬움’을 가리킨다.

이름을 이제야 알았지만, 내가 에테르니스를 느낀 건 최근의 일이 아니다. 지금을 영원히 지속할 수 없다는 데서 촉발되는 슬픔은 인간의 태생적인 한계여서,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노출된다. 어떤 슬픔을 도려낼 수 없다면 동거를 위한 의자를 고르자. 이름 붙이기만큼 중요한 것이다. 에테르니스를 위해서라면 수영장에 놓인 안전요원의 것처럼 높고 고독한 의자를 고르고 싶다. 사각지대가 없도록. 그리하여 내 오래된 슬픔이 거기 앉아있는 동안, 나는 언제라도 시간 앞에 겸허해질 수 있을 것이다. 삶의 찬란한 구간에 풍덩 뛰어들 때도 내 슬픔이 거기 있는 것을 알기에, 필사적으로 지금 여기를 감각하려 애쓸 것이다.

윤고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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