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개발 뉴트렌드 떠오른 ‘오픈 이노베이션’
오픈 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이 바이오제약 산업 최대 화두로 떠올랐다. 각자도생해 신약을 개발하던 과거와 달리 필요에 따라 손을 잡는 사례가 늘고 있다. 확실한 성공 사례도 등장했다. 바이오텍과 중견 제약사, 외국 빅파마가 협력한 유한양행 비소세포폐암 치료제 ‘렉라자(성분명 레이저티닙)’가 미국 식품의약국(FDA) 허들을 넘은 것. 이영미 유한양행 R&BD(사업화 연계 연구개발) 부사장은 지난 8월 23일 기자 간담회에서 “오픈 이노베이션은 내부 역량으로만 성장을 도모하던 시대에서 한국 제약·바이오 산업이 글로벌 시장으로 나아가는 모든 경계를 허물고 있다”고 강조했다.
2015년 후보물질 사들여 기술 수출
오픈 이노베이션 개념을 처음 주장한 이는 헨리 체스브로(Henry Chesbrough) UC버클리대 교수다. 체스브로 교수는 오픈 이노베이션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했다. 내향형과 외향형이다. 내향형은 기업이 외부 기술을 사들이는 것을 말한다. 반대로 외향형은 기술을 외부로 수출해 상업화하는 방안을 의미한다. 유한양행 렉라자는 내향형과 외향형을 결합한 오픈 이노베이션 결과물이다.
렉라자를 처음 발굴한 것은 유한양행이 아니다. 유한양행은 2015년 오스코텍 자회사 제노스코의 신약 후보물질을 도입했다. 시작부터 논란이 뒤따랐다. 당시까지 ‘신약 개발’과 거리가 멀었던 만큼 ‘결과물을 낼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이 불거졌다. 특히 도입 당시 동물 실험도 마치지 않은 전임상 직전 초기 개발 단계 물질이었던 만큼 걱정이 컸다. 그럼에도 유한양행은 물질 최적화와 공정 개발, 전임상시험 등을 진행했다. 이후 기술 수출을 추진했지만 결과는 아쉬웠다. 2016년 중국 제약사 뤄신에 기술 수출했지만, 뤄신 측 계약 불이행으로 5개월 만에 해지돼 반환됐다. 이후 얀센이 관심을 보였고 2018년 양측은 기술 수출 계약을 체결했다. 총 계약 규모는 12억5500만달러(약 1조6939억원). 얀센은 한국을 제외한 전 세계에서 렉라자 관련 병용 개발과 상업화 권리를 갖게 됐다.
얀센과 유한양행은 렉라자를 활용한 다양한 치료법을 연구했다. 단독 요법뿐 아니라 얀센이 개발한 리브리반트(아미반타맙)와 병용 치료하는 방식도 고민해왔다. 이후 얀센 모회사 존슨앤드존슨(J&J)은 지난해 12월 미국 식품의약국에 렉라자 병용 요법의 신약허가신청서(NDA)와 추가 생물학적제제 허가신청서(sBLA)를 제출했다. FDA는 올해 2월 렉라자 병용 요법을 우선심사 대상으로 승인했다. 연내 FDA 승인 가능성을 점치는 의견이 힘을 받았고, 지난 8월 20일(현지 시간) FDA는 렉라자 병용 요법을 전이성 비소세포폐암 1차 치료제로 허가했다.
유한양행은 FDA 허가에 따른 마일스톤(단계별 수수료) 6000만달러(약 800억원)를 확보했다. 이후 판매 로열티는 별개다. 증권가는 매출에 중요한 요소로 미국종합암네트워크(NCCN) 가이드라인 등재 등을 꼽고 있다. 비소세포폐암 1차 치료 NCCN 가이드라인에는 ‘권고·선호(preferred)’로 타그리소 단독 요법만 등재돼 있다. 렉라자 병용 요법이 타그리소와 경쟁하려면 선호 등재가 사실상 필수다. 등재 요건은 효능과 안전성에 대한 근거다. 유한양행 측은 렉라자 병용 요법의 NCCN 선호 등재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NCCN 선호 등재 가능성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김열홍 유한양행 사장은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답했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도 이례적으로 개별 기업 성과 관련 논평을 냈다. 핵심은 오픈 이노베이션을 강화하자는 것. 한국제약바이오협회는 “렉라자는 국내외 기업이 협력한 오픈 이노베이션의 대표적 성공 사례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한층 각별하다”며 “제약·바이오 산업계는 지속적인 오픈 이노베이션의 확산과 과감한 R&D 투자 확대, 정부와의 민관협력 강화 등을 통해 제2, 제3의 미국 FDA 승인 신약을 탄생시키고 나아가 세계 6대 제약바이오 강국 도약의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한다”고 밝혔다.
연구개발 비용 부담도 덜어
바이오 산업계가 오픈 이노베이션을 주목하는 이유는 뭘까. 업계 관계자들은 산업 환경 변화와 관련 있다고 입을 모은다. 체스브로 교수가 강조한 “산업을 둘러싼 지식 환경(Knowledge landscape)이 변할 때 오픈 이노베이션이 떠오른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체스브로 교수는 “지식 창출 주체가 달라지면 변화가 찾아온다”며 “대기업은 점차 자신들만의 연구 역량이 최고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외부 협력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고 덧붙였다.
바이오 업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대기업이 인재를 독점한다. 주요 전문 인력은 모두 대기업이 운영하는 연구원에 모였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정부 차원에서 조 단위 투자를 앞세워 바이오 전문 인력 양성과 창업을 유인하며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바이오 부문과 거리가 멀던 벤처캐피털(VC) 등도 투자에 뛰어들어 산업 규모를 키웠다. 이후 연구원에 있던 인재들이 회사를 나와 창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유한양행 렉라자 기반이 된 신약 후보물질을 만든 제노스코 역시 LG생명과학(현 LG화학) 연구원 출신 고종성 박사가 2008년 창업했다. 지식 창출 주체가 대기업에서 바이오텍 등으로 다양해진 셈이다.
이런 변화는 수치로도 드러난다. 한국바이오협회가 내놓은 ‘2024년 1분기 상장 바이오헬스케어 기업 동향조사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대기업과 중소기업 연구개발 인력 규모는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대기업은 전체 인력 1만845명 중 1848명이 연구개발 인력, 중소기업은 전체 인력 3541명 중 1004명이 연구개발 인력으로 집계됐다. 전체 인력 중 비중으로 따지면 17%와 27.6%다. 바이오 산업의 경우 중소기업이 오히려 연구개발에 투자를 집중하는 셈이다.
또 다른 이유는 비용과 시간 절감이다. 신약 개발은 비용·시간 리스크가 크다. 임상 3상까지 가도 성공 확률은 절반이 채 안 된다고 알려졌다. 이마저도 시간과 비용이 충분히 투자됐을 때 얘기다. 평균 15년 동안 최소 1조원 이상이 필요하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얘기다. 더 큰 문제는 연구개발에 필요한 비용은 계속 늘어나는 반면 제품 수명은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신약을 개발해도 시장에서 독점 지위를 누릴 수 있는 기간이 단축되고 있다. 관련 업계 관계자는 “가장 큰 신약 시장인 미국 역시 정부 차원에서 바이오시밀러(바이오의약품 복제약)와 제네릭(합성의약품 복제약) 우호 정책을 연이어 내놓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기업 입장에서 유망한 후보물질을 사들여 내재화한 뒤 기술 수출하는 오픈 이노베이션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연구개발 비용을 줄이고 수익 창출 시점도 앞당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다자 업무협약 사례도
오픈 이노베이션에 뛰어든 업체는 유한양행 외에도 여럿이다. 주요 제약 기업들이 산업계 안팎으로 공동 연구를 확장하는 분위기다. 기업 간 협력을 뛰어넘는 산·학·연 다자 업무협약까지 진행 중이다.
아이엠바이오로직스는 최근 HK이노엔·와이바이오로직스 등 3사가 공동 개발한 자가면역질환 항체 신약 후보물질 ‘IMB-101(OXTIMA)’을 중국 화동제약에 기술이전했다. 계약 규모는 계약금 800만달러(약 109억원)를 포함해 총 3억1550만달러(약 4300억원)다. 기술이전 권리 지역은 한국과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지역이다. 출시 후 매출에 따른 로열티도 별도 수령한다. OXTIMA는 HK이노엔이 CJ헬스케어 시절이던 2016년부터 항체 전문 기업 와이바이오로직스와 공동 연구를 통해 발굴한 물질로 2020년 아이엠바이오로직스에 기술이전됐다. HK이노엔 관계자는 “자체 연구개발은 물론 적극적인 오픈 이노베이션으로 경쟁력 있는 파이프라인을 발굴해 기술 수출·상업화 등 성과를 꾸준히 만들어낼 것”이라고 말했다.
동아ST와 자회사 뉴로보파마슈티컬스, 국내 바이오벤처 이뮤노포지와 비만 치료 신약을 공동 연구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3사는 1개월 동안 약효가 지속되는 비만 치료제를 개발할 계획이다. 신약 후보물질은 동아ST와 뉴로보파마슈티컬스가 확보했다. 후보물질에 이뮤노포지가 보유한 반감기 연장 약물 플랫폼 ‘ELP(Elastin-Like Polypep-tide)’를 적용하는 방식이다.
한미약품은 한국과학기술원(KAIST), 연세대 등 학계와 손잡았다. 이들은 최근 공동으로 새로운 대사이상지방간질환(MASLD) 동물 모델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MASLD는 지방간에서 시작해 지방간염과 간섬유화, 간경화, 간암으로 이어지는 만성질환이다. 사망률이 높아 발병 초기 적절한 치료가 필요하다. 유병률은 20∼30%에 달할 정도로 높지만, 현재까지 제품화된 치료제는 없다. 또 아직까지 사람의 MASLD를 잘 모사할 수 있는 적절한 동물 모델이 없어 병인 기전 규명과 치료제 개발에 어려움을 겪었다. 김하일 KAIST 교수는 “현재 대사이상지방간질환 동물 모델은 당뇨, 비만과 같은 대사질환을 잘 반영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다”며 “이번에 개발한 동물 모델은 만성대사질환의 특징을 잘 모사해 대사이상지방간질환 발병 규명과 치료제 개발에 유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풍제약도 학계와 손잡았다. 한세광 포항공대(POSTECH) 신소재공학과 교수 연구팀과 공동으로 연구한 무릎 골관절염 신약을 곧 선보일 예정이다. 신풍제약은 한 교수 연구팀과 함께 2021년 체내에서 분해 속도가 조절되는 골관절염 치료제인 ‘히알루론산 하이드로젤’을 개발, 해당 물질에 적용된 분해 속도 조절 기술을 특허출원했다. 최근 품목명 ‘하이알플렉스주’로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허가를 받았다. 2025년 공개가 목표다.
전문가들은 산·학·연 협력이 한층 강화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엄승인 한국제약바이오협회 정책본부 전무는 최근 ‘글로벌 바이오 산학연병정의 유기적 공조 생태계 방안’ 토론회에 참석해 “학계와 기업 간에도 성공적인 오픈 이노베이션 사례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국가신약개발사업단(KDDF)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우리나라 신약 개발 파이프라인은 1650개로 이 중 1168개(70.8%)는 산업계, 413개(25%)는 학계가 보유하고 있다. 산학이 협력한다면 신약 개발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 등 리스크를 감소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동시에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엄 전무는 “정부는 신약 연구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고, 기업들이 연구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세제 혜택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며 “실질적인 R&D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정부가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환경을 조성해줬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이에 국가신약개발사업단 등도 오픈 이노베이션을 위한 자리 마련에 나서는 모양새다. 국가신약개발사업단은 오는 10월 한국제약바이오협회와 함께 ‘팜&바이오 이노베이티브 파트너십 데이’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들의 기술 공유와 오픈 이노베이션 협력 구축의 장을 만들겠다는 의지다.
[최창원 기자 choi.changwon@mk.co.kr, 반진욱 기자 ban.jinuk@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76호 (2024.09.11~2024.09.26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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