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방화사건 다룬 영화, 왜 이런 방식으로 각색했을까
[조영준 기자]
▲ 영화 <새벽 두시에 불을 붙여> 스틸컷 |
ⓒ 인디그라운드 |
01.
1995년 8월 21일 새벽 2시 6분경, 경기도 용인군에 위치한 경기여자기술학교에서 화재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화재경보기는 시끄럽다는 이유로 학원 측에서 이미 작동을 꺼놓은 상태였고, 소화기의 소화액은 모두 굳어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2층 기숙사에 있던 원생 40명이 질식사하고 20명이 부상을 입는다.
이후 조사에 의하면 이 참사는 일부 원생들이 사감을 인질로 잡아 포박시키고 방화를 저지른 뒤 탈주하고자 계획하며 일어났다. 1994년 1월에도 이미 시설 측의 강압적 교육에 불만을 품은 원생이 방화 후 탈주를 시도하다 경찰에 구속된 바 있다. 이 모든 사건의 배경에는 구타와 욕설을 일삼고 편지를 검열하거나 기숙사 문과 창문에 쇠사슬을 설치하는 등의 심각한 수준의 폭력을 일삼은 학원 측의 심각한 인권침해가 있었다.
유종석 감독이 연출한 영화 <새벽 두시에 불을 붙여>는 앞서 설명한 '경기여자기술학원 화재 사건'을 모티브로 하는 작품이다. 탈주를 시도하다 실패하는 과거 시점의 장면으로부터 화재 참사가 일어나는 8월 21일 새벽 2시경의 순간까지를 하나의 작품 속에 압축적으로 담아낸다. 영화 속에서 이 공간은 '화천여자기술학원'으로 대신 불리게 된다.
▲ 영화 <새벽 두시에 불을 붙여> 스틸컷 |
ⓒ 인디그라운드 |
엄마가 도망간 상황에서 공짜로 기술을 가르쳐 준다는 이야기에 학원에 오게 된 선아(온정연 분)와 다니던 공장에서 잘렸는데 학교로 돌아갈 수 없어 오게 된 하진(김민지 분), 그리고 아빠가 보내서 왔다는 자신의 이야기까지. 영화는 화자인 서리가 기술학원으로 오게 된 원생들의 사연을 설명하면서 시작된다. 하지만 이들은 기술학원이라는 이름과 달리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고, 외부와의 연락도 차단된 채 자행되는 폭력 안에서 생활하게 된다. 이곳이 처음 생겼을 때는 나쁜 짓을 하면 끌려오는 곳이었다는 걸 알지만 그건 윗 세대의 이야기이지 자신들은 잘못으로 인해 잡혀온 게 아니라고 항변하는 이유다.
실제 모티브가 되는 '경기여자기술학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국가에 의해 적발된 매춘 여성들을 수감하던 장소로 활용되던 공간이, 후반부터는 학교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가출 및 비행을 일삼는 비행 청소년, 소년범, 고아 등을 수용하는 갱생기관으로 성격이 바뀌며 운영됐다고 알려져 있다.
이를 위해 학원이 자행했던 것은 앞서 언급했던 폭력과 감시를 기반으로 한 인권침해였으며, 강제적인 신앙 및 정신교육까지 실시했다고 한다. 이 작품을 통해 지금 바라보고 있는 장면은 분명 연기와 대본에 의해 짜인 하나의 플롯에 불과하지만 이와 유사한 모습이 실제로 존재했었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영화는 때때로 현실의 가혹한 모습에 기대 자신의 내러티브를 완성해내기도 한다.
03.
"그러니까 생각해 보면 정말 이상한 일이에요. 다른 사람도 아닌 언니가, 하필 유림 언니가 그런 일을 벌인 건."
영화적 구조와 극의 극적인 전개를 위해 만들어진 인물은 서리가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는 유림이다. 그녀는 옥상의 쓰레기 더미 속에서 사감이 내다 버린 편지들을 발견하고는 건물 전체를 불태우기 위한 계획을 세워가기 시작한다. 같은 방에서 먼저 커튼에 불을 지르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숙희 언니의 자리에 난 그을음조차 무서워하며 자리를 바꿔달라던 언니. 불을 너무 싫어하고 무서워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이 모든 사건을 계획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적극성이다.
사실 유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 불우했던 기억과 아버지가 가족의 보금자리를 지켜내기 위해 만들어야만 했던 화염병에 대한 경험으로 자연스럽게 불에 대한 두려움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경험으로 인해 배운 또 다른 한 가지는 순종적이고 온건한 방법만으로는 자신이 지켜내고자 하는 것을 오롯이 지켜낼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스스로를 내던지는 선택이 필요할 때도 있다는 것. 이 영화에서 화재는, 불은 그런 의미다. 도박에 가까운 행동이기는 하지만, 이 기숙사 건물이 다 타 버리고 말 정도의 화재가 번지면 자신들도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되는 작고 유일한 희망.
▲ 영화 <새벽 두시에 불을 붙여> 스틸컷 |
ⓒ 인디그라운드 |
또 한 번의 8월 21일은 스크린 위에서 반복되고 재현된다. 약속대로 사감실을 습격해 자신들을 내내 괴롭혀왔던 인물을 제압하고 2시 정각에 신호를 전달해 1층과 2층 약속된 장소에서 불을 지르는 행위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점은, 이들이 설계한 이 방화의 과정이 학원에서 경험해야 했던 지독한 폭력과 감시의 축적으로 인해 완성됐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 시간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완벽한 계획은 세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계획하지 못했던 것은 단 하나뿐이다. 화재가 일어나고 활활 타들어가는 건물 속에 아이들이 있는데도 학원 관리자들이 문을 열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상식 밖의 태도와 결과. 그리고 그 장면은 단 두 줄의 차가운 문장으로 완성된다.
아이들이 화원여자기숙학원에 불을 질렀다.
창살과 자물쇠로 막힌 출입문은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다.
어떤 영화는 가공된 이야기를 통해 현실의 결과를 전복시키고 더 나은 미래나 이상향으로 나아가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과거의 어떤 사실을 알리거나 현실의 감각이나 잔상, 상흔을 기억하게 하기 위한 목적의 작품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결과를 따를 수밖에 없게 된다. 참사와 같은 사실을 임의대로 수정하는 일에는 많은 책임이 따르며, 그로 인해 어떤 사건은 미화되거나 사실과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 알려질 수도 있어서다.
비극을 다시 한번 경험해야 하는 일은 실로 어려운 일이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야만 마주할 수 있는 사실도 존재하는 법이다. 영화가 서리의 목소리를 통해 유림의 선택과 행동에 대해 끊임없이 되묻는 이유도 어쩌면 그래서일 것이다.
벌써 30년. 우리는 그 시간 속에서도 숱한 참사를 겪고 수많은 피해자를 만들어왔다. 이 영화의 의미가 모티브가 되는 사건 하나에만 놓여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자신을 위험한 자리에 내던지지 않고서는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들이 존재하고, 이해할 수 없는 선택과 결정으로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는 이들 또한 함께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지키고 어떤 것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하는 것일까. 유종석 감독이 이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하다.
덧붙이는 글 |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하고 한국독립영화협회에서 운영 중인 인디그라운드(Indieground)는 2024년 2월 15일(목)부터 총 18개의 큐레이션을 통해 ‘2023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선정작 92편(장편 22편, 단편 70편)을 소개/상영할 예정입니다. 열네 번째 큐레이션인 '영화는 공간이다'는 9월 1일부터 9월 15일까지 보름간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회원 가입 후 무료로 시청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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