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로 남편-딸 잃은 여자의 인생 치유기

김상목 2024. 9. 10.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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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세 가지 색 - 블루>

[김상목 기자]

1990년대, 수십 년 넘게 봉쇄되다시피 했던 동시대 세계 영화와 한국이 만나던 시절, 더없이 풍성하게 영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던 그 시절에 접하게 된 수많은 명작 영화 중에서도 유독 뇌리에 새겨지는 작품이 몇 있다. 벌써 30년 전이라 어느새 내용은 가물거리지만, 작품을 상상하는 이미지는 기묘하게도 잊히지 않는 그런 영화들은 당시에도 포스터 액자로 카페 벽면이나 자신의 방에 고이 간직되곤 했다.

그런 영화 중에도 대표 격이라면 역시 강렬한 색감이 인상적이던 <세 가지 색> 연작 – 블루/화이트/레드 – 을 빼놓을 수 없다. 그중에도 배우 줄리엣 비노쉬의 얼굴을 각인시킨 연작의 첫 작품 <세 가지 색 – 블루>는 여러 차례 재개봉으로 국내 관객들에게 잊을만하면 찰나의 재회를 선사했지만, 여전히 다시 만날 때마다 새로운 발견의 기쁨을 누리게 해주는 역작으로 기억된다. 그런 영화가 다시 4K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돌아왔다.

세상으로 통하는 창문을 닫은 주인공의 치유기
▲ "세 가지 색 - 블루"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스튜디오 산타클로스엔터테인먼트
천재로 추앙받는 음악가 '빠뜨리스'와 결혼해 천사 같은 딸 '마리'를 낳고 남편의 작곡을 도우며 공사 양면에서 완벽한 부부로 살아가던 '줄리'는 가족의 교외 나들이에서 예상하지 못한 교통사고를 당한다.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남편과 딸은 모두 생명을 잃고 혼자만 살아남은 줄리는 차라리 같이 죽었으면 하는 심정일 따름이다. 가족의 장례식도 병상에서 녹화된 영상으로만 간신히 확인할 뿐이니 비통한 마음 견딜 길이 없다. 약을 먹고 죽어보려 했지만, 차마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육신의 상처는 치유되지만 줄리의 영혼은 공허하기만 하다.

줄리는 떠올릴수록 더 상처를 헤집듯 괴로운 가족의 기억을 모두 지워버리고 싶다. 머릿속에 지우개가 있다면 좋으련만 심정일 테다. 그는 남편과의 추억을 의도적으로 지워나간다. 추억 가득한 저택을 팔고, 남편과의 미완성 작업 원고를 폐기해 버린다. 언론과의 일체의 접촉을 거부하고, 지인들에게 행방을 알리지 않은 채 교외의 아파트로 몰래 이사한다. 아무도 자신을 알지 못하고, 누구와도 사적인 교감을 나누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의 표명이다.

남편은 유럽 통합을 기념하는 문화예술 프로젝트 일환으로 의뢰받은 '유럽 통합을 위한 협주곡'의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실은 줄리 본인도 남편의 작업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세상은 빠트리스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미완성 프로젝트 향방에 촉각을 기울인다. 남편의 음악적 동료이던 '올리비에'는 자신이 친구의 프로젝트를 이어받아 완성하고자 줄리의 협력을 원한다. 실은 올리비에는 친구의 아내를 오랫동안 연모해 왔고, 줄리 역시 이를 잘 안다. 그저 모른 척 외면해 왔을 뿐이다. 올리비에가 몇 달간의 수소문 끝에 자신을 겨우 찾아내지만, 줄리는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어떤 작업도 거부로 일관한다.

줄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공허 속에 지내고 싶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새 거처로 옮겨온 이후 한동안 줄리는 세상과 어떤 연결도 거부한 채로 지낸다. 그에게 남은 건 과거 살던 집의 것과 비슷한 샹들리에와 딸의 추억이 깃든 유품 일부에 불과하다. 줄리는 동네 카페에서 정해진 메뉴, 아이스크림과 커피를 마시고, 꼭 필요한 생필품만 구매한 뒤 집에 틀어박힌다. 동네 수영장에 출입하며 물속에서 외부와 단절되는 체험 정도가 그가 집중력을 발휘하는 유일한 전부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평생 살 수 없다. 이제 30을 갓 넘긴 줄리다. 아래층에는 나이트클럽 댄서로 유흥업에 종사하는 여자가 산다. 단지 주민들이 그를 내쫓자는 서명을 받으러 오지만, 굳이 남 일에 관심이 있을 리 없는 줄리는 서명을 거부한다. 며칠 후 줄리의 집 문을 두드린 아래층 여자 '루실'과 정서적 대화를 이어가며 그는 원치 않은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해 간다.

한번 틈이 열리자 카페 맞은편 골목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부랑자 행색의 거리 음악가에게도 관심이 가고, 오랫동안 왕래가 적었던 치매로 투병 중인 어머니도 찾아가게 된다. 루실이 어느 날 급히 도움을 요청한다. 그의 일터로 급히 간 줄리는 텔레비전 화면에서 죽은 남편의 비밀을 우연히 목격하고, 그저 잊고만 싶었던 과거와 대면해 정리할 것을 결심한다.

주인공이 찾는 자유의 의미를 뒤늦게 포착하다
▲ "세 가지 색 - 블루"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스튜디오 산타클로스엔터테인먼트
1990년대 뒤늦게 찾아온 예술영화 열풍 속에서 이름 외우기 난이도로 쌍벽을 이루던 두 감독이 있었다. 구소련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vs 폴란드의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다. 두 감독의 작품 모두 만만치 않은 진입 장벽에도 불구하고 사후 오래도록 영화애호가들의 추앙을 받으며 꾸준히 재소개 기회를 얻는 점에서도 난형난제다. 타르코프스키의 유작 <희생>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키에슬로프스키의 유작 <세 가지 색> 3부작도 오랜만에 재개봉을 맞은 점도 특기할 만하다.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에서 1980년대 중반 냉전이 마지막 극한에 달하던 당시 핵전쟁과 지구종말의 불안을 새로이 발견했던 것처럼, <세 가지 색 – 블루>에선 1990년대 초반 유럽 통합의 기운과 그에 관한 의구심이 목격된다. 첫 개봉 당시엔 깨닫지 못했던 사후 역사적 관찰인 셈이다.

당시 유럽 통합을 주도하던 프랑스의 국기인 삼색기에 담긴 공화국 이념, '자유-평등-박애' 중 '자유'를 표상하는 '블루'를 형상화하려는 야심 찬 시도는 영화 곳곳에서 진가를 뿜어내고 있었다. 프랑스의 상징을 영화화하는 데 당시만 해도 갓 동구 사회주의 블록에서 빠져나온 폴란드 감독에게 작업을 맡긴 것 역시 상당한 논란과 반대를 감수했을 것이란 게 새삼 이색적이다.

줄리는 개인적인 상처에 힘든 나머지 세상과 단절하기를 꾀한다. 초반에 그는 남들이 자신의 삶에 끼어드는 것도, 자신이 타인의 사정에 개입하는 것도 양자 모두 눈 감고 귀 닫은 채 외면으로 일관한다. 거리에서 다수의 폭행에 달아난 이름 모를 남자가 문을 두드리며 구조를 요청해도, 아래층의 품행이 좋지 않은 여자를 내쫓자는 연명에도 줄리는 그저 무관심할 뿐이다. 하지만 심성이 선량한 그가 언제까지나 그렇게 세상과 단절할 순 없는 노릇이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줄리를 감싼 서릿발 같은 냉소는 걷힐 수밖에 없다.

냉기가 약해지자 줄리에겐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새롭게 찬란함을 발하기 시작한다. 물론 그 빛은 때로는 너무나 강렬해 눈을 뜰 수 없게 만들 지경이다. 그리고 밝은 빛은 원치 않던 상처를 후벼내 파기라도 할 듯 사납게 들이닥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 줄리는 고양이와 루실에게 떠맡긴 채 외면하던 진실과 대면할 마음의 준비를 마친다. 그리고 남편과 소중한 추억이 깃든 미완성 협주곡에 관한 숙제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래야만 새롭게 진정한 '자유'를 찾아 출발할 수 있으니 말이다.

영화 속에 깃든 유럽 통합의 꿈 들여다보기
▲ "세 가지 색 - 블루"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스튜디오 산타클로스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자유'가 고립이나 단절, 혹은 개인의 이기심이 아니라 세상과 연결된 가운데 편견이나 타의에 굴복하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고 결정하는 시민의 권리임을 소리 없이 웅변한다. 흔한 긍정론이나 '웃으면 복이 와요' 같은 속류 논리가 아니라 권리와 책임을 함께 짊어진 성숙한 '시민'의 자세를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작업인 것이다. 영화의 모든 요소는 그런 주제의식에 부합되게 활용된다.

특기할 만한 게 'Fade-Out' 효과의 독특한 구사법이다. 영화 속에서 툭툭 끊어지듯 자주 활용되는 암전은 그저 건너뛰기 도구가 아니라 줄리의 머릿속 고민과 사유의 치열한 투쟁으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다시 화면이 밝아지면 배경이 바뀌는 게 아니라 주인공의 판단이 내려진 이후로 기능한다. 그 사용법을 유심히 관찰하면 영화가 다르게 보일 법하다.

줄리는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텔레비전이 등장할 때마다 재생되는 화면 속 풍경은 의미심장한 은유와 상징으로 제 몫을 다한다. 치매 환자인 어머니가 세상 돌아가는 게 다 저 안에 있다며 한참 몰입하는 화면에선 거동도 불편한 노인이 번지점프에 도전하고 있다. 노쇠한 유럽 대륙이 통합이라는 대변화에 도전하는 당대의 기운을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홀로 침잠한 채 시간만 죽이던 주인공이 루실의 달갑지 않은 부탁에 급히 달려가 목격하게 된 남편의 유작 관련 뉴스는 고인의 유지를 이어받아 미완의 유럽 통합을 음악으로 완수하려는 의지의 표명이 될 테다. 물론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충격적인 과거가 만만치 않지만, 오욕의 역사를 본인 대에서 청산하자는 결의가 그 모든 걸 뛰어넘는다. 이 영화 속 주인공의 모든 행위는 곧 완결되어야 할 통합 협주곡, 그리고 영화 바깥의 하나 되는 유럽 비전과 하나의 우주를 이루며 연결된다. 공개된 지 30년이 지난 시점에서 비로소 뒤늦게 이 영화의 탄생배경과 제작 동기를 한눈에 투시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물론 작금의 혼란에 휩싸인 세계 속, 자유와 평등, 박애가 대륙 차원에서 가장 완성된 현재라 모두가 부러워하던 통합된 유럽의 난맥상을 지켜보는 가운데 <세 가지 색 – 블루>를 재관람하는 건 참 묘한 체험이 될 테다. 영화적으로는 더없이 반가운 재회이지만, 그 영화가 품고 있던 통찰과 기대가 일정한 한계 혹은 좌절에 봉착한 현재 상황에서, 우리는 이 영화를 어떻게 새롭게 독해할 것인가, 어떤 교훈을 추출하고 과거의 낭만과 일정하게 작별을 고할 것인가 숙제를 잔뜩 물려받은 셈이다.

물론 요즘 한창 국내에서 '자유'에 대한 갑론을박이 오가는 시국 역시 한몫 할 테다. 하지만 줄리엣 비노쉬의 독립되고 자유로운 '시민'이 되기 위한 고통 가득한 여정은 여전히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흥을 안긴다.

<작품정보>

세 가지 색 – 블루
Trois Couleurs: Bleu
1993 프랑스 드라마
2024.09.04. (재)개봉 98분 15세 관람가
감독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출연 줄리엣 비노쉬(줄리 드 꾸시/줄리 비용 역), 베누아 레전트(올리비에 베누아 역),
엠마뉘엘 리바(비뇽 부인 역), 플로렌스 퍼넬(상드린 역), 샬롯 베리(루실 역)
수입 ㈜안다미로
제공/배급 ㈜스튜디오 산타클로스엔터테인먼트

50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황금사자상/볼피 컵-여우주연상(줄리엣 비노쉬)/황금카메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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