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와 책방[조남대의 은퇴일기(60)]
책방이라는 단어를 오랜만에 들어본다. 시골스러운 정취 속에 무엇인가 깊숙이 숨겨진 비밀을 간직한 듯하다. 맞다, 그곳엔 추억이 깃들어 있고, 친절함과 여유가 가득했다. 잠시였지만 온전히 우리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었으며, 다시 찾아오게 만드는 마법 같은 여운이 느껴졌다.
기상청 설립 이래 가장 뜨겁다는 소식이 연일 화제다. 휴일이지만 찌는 듯한 더위에 집 안에만 머물 수도, 그렇다고 밖으로 나가도 마땅히 갈 곳이 없는 난감한 상황이다. 이런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딸은 함께 가자며 앞장선다. 목적지를 묻지 않았다. 그저 집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사무실에 출근한 사위를 제외한 손자, 손녀와 우리 부부 이렇게 다섯 식구는 달렸다.
도시를 벗어나자 마음마저 시원해진다. 한 시간을 넘게 달려 용인 양지면 대대저수지를 돌아 숲길로 접어들자, 상쾌한 바람이 가슴 깊숙이 스며드는 듯하다. 딸네가 친구 가족과 다녀왔던 곳인데 어른들을 모시고 가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부모를 세심히 챙기는 데는 딸만 한 이가 없는가 보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 들어서자 “농부와 책방”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따가운 햇볕이 피부에 닿는다. 주인이 우리를 알아보고 우산을 들고나온다. 더위를 막아 주려는 배려에 마음이 포근해진다. 바깥주인은 텃밭에 심어놓은 각종 채소와 과일나무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한다.
고추와 들깨 수박 대파 당근 호박 방울토마토가 자라고 울타리에는 감과 복숭아나무가 무성하다. 채송화는 붉은 입술을 내밀며 유혹의 손짓을 한다. 충분히 영양분을 흡수한 채소들은 진한 녹색의 잎을 자랑하며 키가 훤칠하다. 먼저 눈길이 가는 것은 큼직한 수박이다. 먹고 싶은 유혹을 참으며 침만 삼킨다. 넓지 않은 텃밭이지만 이를 돌보는 바깥주인의 노고가 얼마나 수고스러운지 짐작이 된다.
집 안으로 들어서니 온 벽면이 책으로 가득한 모습이 펼쳐진다. 입구부터 거실과 방 한 칸까지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은 마치 작고 아늑한 도서관에 들어선 듯하다. 거실과 방 중앙에는 널찍한 탁자가 놓여 있어 책을 펼쳐놓고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느긋해진다. 그 순간 삼성동 코엑스의 별마당도서관이 떠올랐다. 아파트 몇 층 높이의 서가에 7만 권이 넘는 책으로 가득한 장엄한 풍경이 머릿속을 스친다. 규모는 그에 미치지 못하지만, 책방의 분위기는 별반 다르지 않다. 책을 사랑하는 주인의 마음이 느껴지며 참으로 멋진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주들은 한 번 와 보아 익숙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자마자 책을 골라 든다. 젊은 엄마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오기에 안성맞춤일 것 같아 보인다.
이 집의 역사는 14년 전, 주변이 온통 황금 들녘으로 물들어 있을 때 시작되었다. 그 풍경에 반해 전원주택을 사서 5년 전부터 책을 좋아하는 부인이 책방으로 꾸미기 시작했다. 지금은 6천 5백 권이나 되는 책이 이곳을 채우고 있다. 모든 책은 새로 산 것이기에 깨끗이 다루어 달라는 부탁도 덧붙였다. 책을 읽고 마음에 드는 것은 구매할 수도 있다. 이렇게 책을 비치하려면 꽤 자금이 들었을 텐데. 모든 책을 일일이 읽어보고 선정했다니 그 열정이 얼마나 깊은지 짐작이 된다. 책을 좋아하는 분이 책 속에 파묻혀 있으니 얼마나 흐뭇할까. 책방은 예약을 통해 오전 열 시부터 2시간 30분 간격으로 이용할 수 있으며, 비용은 한 사람에 만원이다. 가족이나 그룹 단위로 책방 전체를 빌려 여유를 만끽할 수 있다. 책과 더불어 멋진 하루를 선사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다. 코로나 시기에는 가족이나 친지들만으로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에 최적의 장소로 알려져 다섯 달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요즈음도 예약이 가득 차 있다고 하니 이곳의 매력은 여전한 듯하다.
이름이 도서관도, 서점도 아닌 책방이란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책방’이라 불리던 그 친근한 이름이 떠오른다. 책을 읽기만 하는 장소가 아닌 책을 살 수도 있는 곳이기에 도서관보다는 책방이라는 이름이 더 적절하지 않겠는가. 농촌 마을과 잘 어울리는 정감 가득한 상호가 아닐는지. 나이 든 이들은 그 이름에 추억을 떠올리고, 젊은 사람들은 예스러운 매력에 이끌려 호기심을 느끼며 조용하게 시간을 즐기리라. 한쪽에는 다녀간 이들이 남긴 소감과 후기가 빼곡히 메모판을 채우고 있다. 친절한 주인에 대한 감사와 다시 오고 싶다는 소망으로 가득하다. 모퉁이에는 ‘억지로 따라온 남자들을 위한 책’이라는 코너가 마련되어 있는데, ‘김 부장 이야기’, ‘나의 돈 많은 고등학교 친구’와 같은 제목의 책들이 진열되어 있다. 아내를 따라 백화점에 온 남자들이 구석진 의자에 앉아 기다리듯, 이곳에 앉아 있는 이들은 어딘지 모르게 측은해 보일 것 같다. 왜 남자들은 이런 자리에서조차 어울리지 못하고 천덕꾸러기 같은 신세로 애잔해야 할까. 나 역시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느끼며 한숨을 토한다.
중환자실 간호사로 일하는 아내가 주로 이 책방을 관리한다. 병원 근무시간 동안에는 친정어머니와 농부인 남편은 물론 함께 사는 아들과 딸도 틈틈이 도움의 손길을 더해 준다. 커피와 음료는 물론, 집에서 기른 블루베리와 방울토마토 같은 간식에 친절함까지 더해져 이곳의 매력은 더욱 깊어진다. 별채에도 작은 도서관이 있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고, 숙박을 원하는 이들을 위한 딴채에 아늑한 잠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시원한 가을이 오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룻밤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황금빛으로 물든 시골길을 뚜벅뚜벅 걷다 귀뚜라미 소리 들리는 침대에 누우면 어린 시절의 추억이 소록소록 피어오르지 않을까. 아침에는 텃밭에서 딴 신선한 채소로 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손수 기른 표고버섯과 참기름을 사서 시골의 정취를 두고두고 음미해 보리라.
옛 생각이 떠오르고 아름다웠던 시절을 그리워하고 추억을 되새기며 살아가는 나이인가보다. 특별한 책방은 지친 한여름에 더위를 피해 호젓하게 쉬어갈 수 있는 아늑한 안식처처럼 다가왔다. 고향의 향기가 짙게 배어 있고 읍내 책방에서 참고서를 사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돌아오는 길에 텃밭에서 따온 싱싱한 들깻잎으로 삼겹살을 쌈 싸 먹었던 고소하고 깊은 맛이 다시금 이곳을 그립게 만들 것이다. 삶의 여정에서 잠시 멈춰 짧은 도돌이표를 찍어볼 수 있는 지점이 있다면 망설임 없이 이 ‘농부와 책방’에 머물고 싶다
조남대 작가ndcho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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