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범국 딱지는 가혹하다? 이 애니의 놀라운 변명
[김성호 기자]
선 곳이 달라지면 보이는 것도 달라진다. 보는 것이 달라지면 생각하는 것이 달라진다. 생각이 달라지면 행동 또한 달라진다. 요컨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되어보는 것, 진실로 다른 시야를 얻고 다른 삶을 살아보는 것은 나의 오랜 목표였다. 작가가 되고자 분투했던 지난 시간 가운데 완전히 다른 사고를 얻기 위한 작업을 꾸준히 해온 건 그래서였다. 모범생이 되어 명문대에 진학해보고, 다시 수년 동안 휴학을 하고 수십 개의 새로운 일을 해보고, 기자가 되어 다른 이의 삶을 파고들며, 항해사가 되어 먼 바다를 떠도는 것 하나하나가 그러했다.
저기 마크 트웨인이며 헤밍웨이, 보들레르와 허먼 멜빌, 올리버 스톤 같은 이들이 배를 탔고, 생 텍쥐 페리와 리차드 바크, 로맹 가리 같은 이가 비행기를 몬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들은 하나 같이 선 곳이 달라지면 다른 생각을, 다른 사고를 얻으면 다른 인간이 된다고 말한다. 어느 동네에선 중요한 것이 다른 세상에선 하잘 것 없는 일을 수시로 겪어나간다. 또 그 반대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로부터 얻은 깨달음을 이들은 자기 작품에 녹여내곤 했던 것이다.
▲ <진격의 거인> 포스터 |
ⓒ NHK |
<진격의 거인>은 다분히 일본적인 작품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산업인 애니메이션 업계의 대표작이란 뜻에서가 아니다. 일본인이 아니라면 이를 수 없는 생각, 다시 말해 일본인이기에 할 수 있었던 사고의 지점들이 고스란히 작품의 틀과 무늬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초대형 거인이 변신할 때 원자폭탄의 버섯구름을 연상케 하는 효과가 일어나는 것, 벽 안에 갇혀 있던 인간이 당해낼 수 없을 것처럼 여겨졌던 벽 바깥의 세계로 나아가 역습하는 것, 나아가 섬과 대륙 간 경쟁구도와 이대로라면 고립돼 패망할 수밖에 없는 섬의 위기감, 무엇보다 선조의 죄상을 후손이 져야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 언급된다는 점이 그렇다.
작품의 발상과 착상, 가벼운 설정부터 근간이 되는 주제의식까지 오늘의 일본과 통하는 바가 적잖다. 일본인이기에 해낼 수 있었던 생각을 짚어보는 건 그들과 가깝고도 먼 오늘의 한국인에게도 그 의미가 적잖다. 무엇보다 일본적인 작품으로 일본인을, 나아가 세계인을 설득해낸 <진격의 거인> 시리즈의 성취는 그 자체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진격의 거인> 3기는 2018년부터 2019년까지 두 개의 파트로 나뉘어 상영된 대작 TV애니메이션이다. 앞서 제작된 1기와 2기가 따로 파트를 나누지 않고 한달음에 방영됐던 걸 고려하면 이야기가 풍부하고 다채롭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사실 3기야말로 <진격의 거인> 시리즈가 거둔 대단한 성취의 기둥이라 할 만하다. 처음 방영된 1기가 인간과 거인이 서로를 상대로 격전을 벌인다는 설정과 세련된 연출로 화제가 됐다면, 3기는 이야기의 본질인 설정과 구성으로 독보적이라는 평가를 받아낸 결정적 작품이다.
▲ <진격의 거인> 스틸컷 |
ⓒ NHK |
1기는 벽 안에 갇힌 인류가 벽 바깥으로 나아가려 발버둥치는 이야기다. 인류는 거인과의 오랜 대전에서 물러나 거대한 벽으로 둘러싸인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중이다. 벽 바깥엔 인간을 잡아먹는 거인들이 나다니는 가운데, 조사병단이라 불리는 군대만이 수시로 벽 바깥으로 나아가 인류의 역습을 위한 가능성을 모색한다.
벽 안의 평화가 지속된 지 어언 100년, 벽 안 세상의 최남단 마을에 사는 아이들의 눈앞에 이제껏 본 적 없는 거대한 거인이 나타난다. 거인의 기습으로 벽이 무너지고 인류의 평화는 깨어진다. 살기 위한 인류의 저항과 침입한 거인의 싸움이 지속되는 가운데, 앨런과 미카사, 아르민이란 세 아이가 조사병단에 입단하기 위해 군대에 지원한다.
2기는 1기와 3기를 잇기 위한 지리한 싸움을 그린다. 앞서 군대에 입대한 아이들이 조사병단에 배속돼 거인과의 싸움에 나서고, 그 과정에서 우정과 사랑, 존중을 느끼는 과정이 흥미롭게 묘사된다. <해리포터>, <헝거게임> 등 성공한 하이틴 판타지의 성공방정식 그대로, 아이들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성장해가며 다가올 위기에 대응해나가는 모습을 주요한 얼개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저 타자인 줄만 알았던 거인들에게도 저만의 세계가 있음이 확인되고, 심지어는 동료라 여겼던 이들 중에서도 거인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3기는 2기의 반전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게 할 만큼 파격적이다. 벽 안이 전부인 줄로만 알았던 인류가 실은 고립된 소국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이다. 벽 바깥엔 드넓은 사막과 바다가 있고, 그 건너엔 수많은 인간과 국가가 들어찬 대륙이 있다. 어째서 앨런이 나고 자란 세상이, 인류인 줄로만 알았던 이 나라가 대대로 벽 안에 들어 근시안적 평화를 누렸는지가 3기의 관심이 된다.
▲ <진격의 거인> 스틸컷 |
ⓒ NHK |
3기의 마지막 몇 편은 가히 충격적이다. 이야기의 초점이 벽 안에 갇힌 이들로부터 저 멀리 바다 건너 대륙의 한 국가 마레로 향한다. 마레의 외곽엔 마치 나치 수용소를 연상케 하는 거주구역이 있고, 이곳에서 거주해야만 하는 특정한 민족이 있다. 그들의 이름은 에르디안, 한때 강성했던 에르디아 제국의 후예다.
에르디안에겐 특별한 힘이 있는데 다름 아닌 거인이 될 수 있다는 것. 에르디안의 시조인 유미르가 어떤 생명과 접촉한 이래 얻었다는 그 신비의 힘으로 에르디안은 열국 가운데 최강의 국가로 자리매김한다. 최초의 거인이 가진 힘이 아홉으로 나뉘어서 아홉 거인이 에르디안 가운데 계승되게 됐는데, 마레가 공작을 펼친 끝에 이중 일곱을 저들의 수하로 삼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결국 에르디아의 왕이 저 멀리 섬으로 도피해 거인의 힘으로 벽을 쌓고 스스로를 가두니 지난 시간의 평화가 그로부터 이뤄지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에르디안이 다 같이 섬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건 아니다. 대륙에 남은 많은 에르디안은 수용소에 갇히고 온갖 멸시와 핍박을 견뎌내야 했다. 나치 치하의 유태인, 아니 오늘날 이스라엘 치하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고통을 에르디안들은 감당한다. 그로부터 에르디안을 해방하려는 조직이 생겨나고, 테러와 이를 막으려는 공작, 탄압과 저항이 일어난다. 3기의 마지막은 대륙의 에르디안이 벽 안 세상을 찾아오는 기적적인 과거사로부터 1기와 2기의 주인공이었던 앨런의 탄생비화로 이어지게 된다. 이 애니가 그리고 있는 이야기가 참으로 깊고 넓은 것이다.
▲ <진격의 거인> 스틸컷 |
ⓒ NHK |
혹자는 앞 세대가 저지른 잘못으로 지나치리만큼 처절하게 고통 받는 에르디안의 묘사가 오늘의 일본인이 자기변명하는 꼴이 아니냐 비판할 수 있겠다. 물론 그와 같은 비판도 상당부분 이해가 된다. 에르디안이 당하는 처절한 고통에 비해, 현대 일본인이 전쟁에 대해 지는 책임은 물리적으로는 없다 해도 될 정도니 말이다. 전쟁범죄에 대해 사죄하지도, 제대로 인정하지도 않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 왔던 그들이 스스로 역사조차도 기록해 가르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두 사례의 유의미한 결합이 불편하게 느껴질 밖에 없다.
일본의 현대사와 이야기를 달리 볼 수 없는 것은 글 초입에서 적었듯 원자폭탄을 연상케 하는 설정 등 실재하는 역사와 창작물 사이의 연관을 여럿 찾아볼 수 있는 탓이다. 과거의 죄상을 인정할지라도 거인에게 공격을 받는 지금 세대의 고통은 달리 보아야 한다고, 이 애니가 주장하고 있다 이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원폭을 연상케 하는 초대형 거인의 뭉게구름을 거듭 표현한 건 전범국이 아닌 그 폭격의 피해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 시대 일본인, 또 작가의 태도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전범국가, 그것도 꾸준히 평화헌법을 무력화시키려 드는 나라의 시민으로서 자기변명을 하는 일의 중함을 <진격의 거인>은 얼마 돌아보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과거의 죄상과 관련 없이 살아왔다 믿는 오늘의 일본인의 억울한 감성을 이 애니는 절묘하게 드러낸다. 한 발 떨어져 바라보자면 이 시리즈가 내보인 주장엔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아마도 한국인, 또 일제로부터 피해를 입은 당사국 국민이 아니라면 모두가 같은 마음을 품을 것이다. 각각 전범국과 피해국의 국민이란 차이가 작품을 만들고 보는 태도를 완전히 달라지게 만든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멀리 갈 것도 없다. 같은 견지에서 한국은 베트남 전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베트남 참전 군인을 위로하고 존중하는 만큼, 명분 없이 침탈전에 동참한 우리의 죄상을 제대로 들여다보려 하는가. 총칼로 타국에서 저지른 잘못에 대해 제대로 된 사죄가 없기로는 한국 또한 매한가지. 시야가 가려진 곳에 선 채 나는 피해자일 뿐이라고 자위하는 태도는 답이 될 수 없단 걸 이 뛰어나면서도 못난 작품이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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