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계 '떠난 버스' 잡으려 '오는 버스' 안 탄다? 환자들만 속탄다 [현장에서]
"정부가 2025년을 포함해 모든 증원을 취소하고, 2027년 의대 정원부터 양자가 공정하게 논의할 것을 제안한다."
대한의사협회(의협)가 9일 내놓은 '대국민 호소문'의 일부다. 지난 6일 여당이 제시한 ‘여·야·의·정 협의체’ 참여 요청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다. 내년도 의대 증원 백지화는 의협이 강조해온 입장이자, 정부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힌 마지노선이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이날 "의료계의 대승적 참여를 부탁드린다"고 했지만, 의료계는 사실상 참여 거부에 가까운 메시지를 던졌다.
전공의 이탈에 따른 의료공백 사태가 6개월을 넘어선 가운데, 그간 강경하던 당정이 움직이면서 협상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응급실을 비롯한 의료체계 붕괴 위기감이 커졌기 때문이다. 정부를 비판해온 야당은 여·야·의·정 협의체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차질 없는 의료개혁을 강조해온 대통령실도 2026년도 의대 증원에서 '제로 베이스' 등을 언급하며 톤이 누그러졌다. 그러나 의협과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 등 의사단체는 '신중 모드'를 이어간다. 이들이 없으면 협의체는 공회전만 거듭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들로선 사태 해결의 키를 쥔 전공의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 '복귀하지 않겠다'는 강경론을 고수하는 전공의가 여전히 많아서다. "협의체에서 내년도 의대 증원 문제를 우선 논의하지 않으면 전공의·의대생이 돌아오지 않는 만큼 대화의 의미가 없을 것"(김성근 전의교협 대변인)이라고 강조한다.
의정갈등이 길어지면서 대(對) 정부 불신이 누적된 것도 영향을 미친다. 최안나 의협 대변인은 "정부는 2000년 의약분업 때부터 약속한 걸 하나도 지키지 않았다. 협의가 의미가 없는데, 지켜지지 않을 협의를 왜 하겠나"라고 말했다.
하지만 어렵게 꾸려지는 협의체에 무작정 참여를 미루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의협 관계자는 "그간 실효성 있는 논의 구조 등을 요구했지만, 정부가 바뀌지 않아서 안 들어갔다"고 밝혔다. 의정 간 대화가 막힌 책임은 정부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의정을 넘어 정치권이 모두 참여하는 판에도 들어가지 않는 건 이들이 '대화 거부' 주체임을 보여주는 셈이다. '장외' TV토론 등에만 나설 뿐, 협상의 장에 뛰어들어 상대방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 "정부가 움직일 수 있도록 여야에 당부드린다"라거나 "(참여하든 안 하든)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다"고만 한다.
내년도 의대 증원을 계속 붙잡고 있는 것도 현실성이 떨어진다. 이미 9일부터 대입 수시모집 원서 접수가 시작됐고, 수험생과 대학 등은 의대 입시 준비를 마쳤다. 의료공백에 따른 여론 악화에도 내년 의대 1500명 증원에 '잘된 일'이라는 국민 응답이 여전히 절반 넘는 56%다(이달 3~5일 한국갤럽 여론조사).
'떠난 버스'를 억지로 붙잡으려다가 오히려 대입 체계 전반이 흔들리고, 정책 불신만 커질 수밖에 없다. 이젠 2026년도 이후 의대 정원, 필수의료 지원책 등 '오는 버스'를 어떻게든 바꿔보는 게 현실적이다.
당연히 정부는 의료공백을 키운 책임이 있다. 더 전향적인 입장을 보이면서 의사 설득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결국 환자를 살리는 건 의사다. 의사단체가 내년 의대 증원에 매달려 대화를 머뭇거리는 사이, 환자를 살리기 위한 '골든타임'은 점차 줄어든다. 당장 추석 연휴 '응급실 대란' 우려가 나오고, 향후 중증 수술 등 필수의료 중심으로 구멍이 커질 것이다.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가 호소한 것처럼 이젠 '환자를 위한 대화'를 먼저 생각할 때다. "여·야·의·정 모두 의료공백과 환자 피해에 책임이 있습니다. 이번 협의체가 내년도 의대 증원 조정을 위한 것인지, 환자 피해를 종식하기 위한 것인지부터 분명히 해야 합니다. 어금니 깨물며 참고 있는 환자들은 의대 증원 2라운드가 아니라 어떻게든 의료공백을 해결해줄 자리가 필요합니다."
정종훈 기자 sakehoon@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10년 불행, 한 달만에 바뀐다" 주역 대가의 복 부르는 관상 | 중앙일보
- 결혼 열흘만에 가출한 베트남 아내, 노래방서 잡히자 한 말 | 중앙일보
- 쌈은 배추보다 깻잎이다, 당뇨 막을 최고의 식품 셋 | 중앙일보
- "탄 고기 암 걸려" 피하는 한국인…이 '1군 발암물질' 왜 사랑하나 | 중앙일보
- 배우 사강, 남편 사별 후 근황…"슬퍼할 겨를 없이 가장됐다" | 중앙일보
- "수리비 2200억? 그냥 폭파하자"…美 22층 빌딩 순식간 와르르 | 중앙일보
- 이강인, 또 열애설…'두산가 5세' 어깨 감싸안고 파리 데이트 | 중앙일보
- 복지포인트만 연간 840만원…삼전·SK 뺨치는 이 회사 어디 | 중앙일보
- 2억 신차를 "7000만원에 샀다"…연두색 번호판 피하려 이런 꼼수 | 중앙일보
- 김정일 죽자 "원수도 문상"…남한 스파이는 35만원 부조했다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