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욱의 시시각각] 바위 같은 민심, 칼날 위 보수
“앞으로 대통령은 ‘이념’의 ‘이’ 글자도 안 꺼낼 겁니다. 두고 보세요.”
윤석열 대통령과 가까운 여권 관계자가 지난해 10월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참패 직후 들려준 얘기다. 당시 선거에서 국민의힘은 야당에 17.15%포인트 차로 졌다. 당시 윤 대통령 주변에서 “먹고살기 힘든 국민에게 이념 타령이 먹히지 않았다”는 분석이 나왔다고 한다. 윤 대통령도 이를 인정하면서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는 전언이었다. 물론 당시엔 이것 말고도 악재들이 수두룩했다. 일단 후보 공천부터가 유권자들의 머리를 갸우뚱하게 했다. 야당이 ‘김행랑(김행+줄행랑) 사태’라 부른 장관 인선 문제도 시끄러웠다. 그렇지만 광복절을 계기로 급발진한 이념 논쟁만큼 중도층 유권자를 힘 빠지게 한 건 없었다. 느닷없는 ‘홍범도 지우기’에 집권당 연찬회에서 나온 대통령의 “제일 중요한 건 이념” 발언은 생업에 바쁜 국민들에게 한가함의 극치였다. 그렇게 치러진 선거는 끝 모를 나락의 서곡이자 ‘108대192’란 초유의 정치 지형을 만든 22대 총선 참패의 예고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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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대 지지율로 기울어진 운동장
정권이 무엇을 해도 ‘싫다’가 대세
‘국민 눈높이’ 외엔 위기 극복 없어
」
최근 모임에서 한 참석자가 “현 정권의 장점이자 약점은 ‘내가 하면 잘될 것’이란 낙관적 세계관”이라고 말해 좌중에서 폭소가 터졌다. 이런 세계관 때문인지, 이념 문제에 대한 소명의식의 발로인지, 아니면 격무에 시달리다 지난해의 다짐을 잊은 탓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이번 광복절도 지난해 못지않게 뜨거운 이념과 역사 논쟁으로 얼룩졌다. 한마디 한마디가 시한폭탄처럼 불안한 독립기념관장과 고용노동부 장관을 굳이 지명해야 했을까. ‘반(反)국가세력’ 논란과 둘로 찢어진 광복절 앞에 승자는 아무도 없었다. 총선 직후 크게 하락했다 찔끔찔끔 회복세를 보였던 국정 지지율이 다시 추락한 것도 이즈음이다. 윤 대통령은 “건국절 논쟁이 먹고살기 힘든 국민에게 무슨 도움이 되냐”고 답답해 했다는데, 많은 국민은 외려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라며 되묻고 있다.
20%대 저조한 지지율(한국갤럽 기준)이 지속되면서 ‘기울어진 운동장’이 고착화하는 건 더 큰 문제다. 과거엔 상황과 이슈에 따라 여론 지형이 오락가락했지만 이제 정부가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반대하고 보는 ‘묻지마 비토’가 일상화된 느낌이다. 특히 정부·여당 측 논리가 야당보다 월등히 합리적이고 그럴싸해 보이는 사안에서조차 중도층의 반대 목소리가 바위처럼 단단해졌다. 그러니 정권에 힘이 실릴 리 없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문제가 대표적이다. 객관적으로 야당의 ‘괴담 공세’는 허점투성이인데, 아직도 국민 네 명 중 세 명이 후쿠시마 방류로 인한 해양·수산물 오염을 우려한다는 여론조사가 나왔다. 한국갤럽 조사에서 후쿠시마 방류 위험성이 과장됐다는 견해는 34%에 불과했고, 54%는 ‘과장이 아니다’고 답했다(※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최대 현안인 의대 정원 문제도 그렇다. ‘증원 찬성이냐 반대냐’가 핵심이었지만, 어느새 ‘의료 공백에 정부가 잘 대처하느냐, 아니냐’로 초점이 바뀌면서 정부에 대한 부정 평가가 압도적이다. 정부로선 억울한 노릇이지만, 외면하기 힘든 현실이기도 하다.
한국전쟁으로 치면 밀려 밀려 낙동강 전선에 갇힌 형세임에도 위기 극복을 위한 비상한 각오는 잘 보이지 않는다. 한 방에 민심을 뒤집는 인천상륙작전과 같은 묘수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저 국민의힘 새 지도부가 강조한 ‘국민 눈높이’만 바라보며 똘똘 뭉쳐 일신하는 것 외엔 길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아직도 “공간이 부족해 제2부속실 설치가 늦어진다”는 한가한 얘기가 흘러나오고, 용산과 여당 지도부는 틈만 나면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국정 지지율 30%를 회복할 가능성보다 20%가 무너질 가능성이 더 있다”(박성민 정치컨설팅 민 대표)는 진단이 현실화하지 않도록 여권의 리더들이 밤샘 토론이라도 해야 할 때다.
서승욱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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