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철 논설위원이 간다] “잊히고 싶은 권리 앞에 장벽이 너무 많다”
디지털 장의사가 말하는 디지털 기록 삭제의 오해와 진실
사후 관리→피해구제→평판관리로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기려 갖은 노력을 다하는 게 인간이다. 그런데 인터넷이 보편화하면서 사정이 바뀌었다. SNS 계정에 남은 디지털 기록은 마음대로 없애지 못한다. 이미 세상을 등진 사람의 글에 댓글을 달거나 데이트 신청을 하는 사례도 있다. 사기와 도용 문제도 심심치 않게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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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혀질 권리’로 출발…국내 불법 콘텐트 삭제, 평판 관리 주력
2020년 n번방 사건에서 활약, 4년 지나 딥페이크로 다시 주목
검색과의 싸움, 주기적 모니터링…불법 사이트는 응답 없어
사후 삭제는 한계, 소지·시청 처벌해 수요 기반부터 차단해야
」
2011년 미국에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라이프인슈어드닷컴이라는 회사가 나섰다. 디지털 장의사의 시초다. 마침 유럽연합에서 ‘잊혀질 권리’를 도입하기 위해 논의가 한창이던 때다. 한국에도 이내 도입됐다. 그러나 외국 사례나 장밋빛 전망과 달리 고전을 면치 못했다. 아직 국내에선 사후 잊혀질 권리에 대한 의식이 크지 않았다. 대신 현재 살아가는 사람을 위해 사실과 다른 내용 지워달라는 요청이 몰려들었다. 의도하지 않게 유포된 성관계 영상, 연예인에 대한 근거 없는 험담, 정치인을 상대로 한 비방, 왕따나 개인적 가해 등이다. 기업도 비슷한 문제에 시달렸다. 특히 인플루언서와 맘카페, 유튜버의 힘이 막강해지면서 근거 없는 비방이 실적을 갉아먹는 사례가 빈발했다. 요즘 디지털 장의사의 주 업무는 개인 기록 삭제보다 기업 평판관리로 변하고 있다.
“딥페이크 피해는 이제 시작 단계”
한바탕 폭발적인 관심을 끈 적이 있다. 2020년 ‘n번방 사건’이 터졌을 때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은밀하게 공유되던 성착취물이 외부로 튀어나오면서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데, 도움받을 곳도 없는 상황에서 디지털 장의사들이 고통을 주는 흔적을 지웠다. 그리고 4년 뒤 다시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경기 부천시의 법원·검찰 청사에서 멀지 않은 한 오피스텔. 입주 업체 리스트를 게시한 알림판에서 변호사 사무실, 포렌식 업체들 사이에 ‘클린데이터’란 이름이 눈에 띄었다. 1세대 디지털 장례사 중 한명인 안재원 대표가 운영하는 업체다. 3주 전 인하대 딥페이크 사건이 터지고, 이어 겹지방·지인능욕방 등의 존재가 폭로되면서 디지털 장의사 업계도 호황이라는 소식이 들렸다. 하지만 지난주 찾아간 클린데이터는 차분했다. 안 대표는 “가끔 문의는 오지만 아직 의뢰로 이어진 경우는 없었다”고 말했다. 보통 폐쇄된 비밀 대화방에서 은밀히 주고받는 사진과 영상이 규모가 커지며 외부로 유출되거나 상업적으로 게시되면서 피해자가 알게 되고, 이후 삭제 요청이 쇄도한다. 딥페이크 사건은 아직 피해자가 게시물의 존재도 잘 모르는 시작단계라 삭제 요청으로 이어질 단계는 아니다.
대학 때부터 ‘IT 덕후’였던 안 대표는 웹사이트 운영자와 기록 복원 업체를 거쳐 10여 년 전부터 디지털 삭제 영역에 자리 잡았다. 복구가 기계와의 싸움이라면 삭제는 검색과의 싸움이다. 의뢰인이 현재 유통되고 있는 문제의 게시물 규모를 다 알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일단 계약이 성사되면 문제의 콘텐트가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피해 발생 초기에 알면 그나마 쉽게 찾아내 삭제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작업량은 급격히 늘어난다. 수많은 사람이 퍼 나르며, 2차 유통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걸 게시물 주소별로 일일이 찾아야 한다. 일부 업체는 자동으로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원하는 콘텐트를 찾는 장비(크롤링)를 사용하기도 한다. 클린데이터도 초기에 이런 장비를 자체 제작하거나, 외부에서 구입해 써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당 부분 수작업에 의존한다. 내용을 살짝만 변형해도 초기 검색 값과 다른 게시물로 인식돼 지나치거나, 회원제 유통 채널을 뚫지 못하고 퉁겨져 나오는 경험을 되풀이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만능 삭제 버튼’은 없다.
삭제도 합법적으로만 가능
삭제 대상의 윤곽이 드러나면 진짜 삭제 업무가 시작된다. 여기에도 요술 방망이는 없다. 해킹이나 디지털 공격도 안된다. 게시물이 있는 사이트·포털·플랫폼에 일일이 연락해 삭제를 요청하는 수밖에 없다. 요청 자격도 오직 피해자에게만 있다. 그래서 신청서와 함께 의뢰인의 위임장과 사진을 첨부해야 한다. 안 대표는 “게시물에 나온 10년 전 모습과 사진이 달라 보인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지레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 의외로 국내 포털 등은 선선히 삭제 요청을 받아준다. 위법적인 부분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물론 피해자가 원한다고 다 지워주진 않는다. 위법성 분명해야 한다.
DC 인사이드, 에펨코리아, MLB파크 같은 독립 사이트들은 포털보다 훨씬 깐깐하다. 게시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게시물이 사라지면 해당 사이트나 플랫폼은 금세 소문이 나 영업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특히 애매한 부분이 명예훼손과 주관적 비평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음식을 먹고 맛이 없다고 느꼈다거나, 나쁜 표현을 쓰며 배경에 특정 인물이나 장소·상품을 드러내 보이는 경우다. 플랫폼이나 포털의 태도도 완강해진다. 그럴 땐 게시자를 직접 찾아가 해결하기도 한다. 금전적 사례나 선물을 제공할 때도 있다.
해외 사이트나 플랫폼으로 번지면 훨씬 어려워진다. 한국에서 불법으로 규정된 내용도 현지에선 합법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콘텐트가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상황에서 피해자가 표현의 자유란 장벽을 넘기는 한없이 어렵다. 그나마 구글은 피해 호소에 쉽게 응하는 편이라고 한다. 반면 페이스북이나 엑스, 인스타그램 등은 여간 까다롭지 않다.
그래도 폐쇄된 공간에서 제한된 인원만 공유하는 메신저나 DM에 비하면 수월한 편이다. 둘 만의 대화방이 아닌 단체 방이라고 해도 일단 폐쇄하면 흔적을 잡기가 쉽지 않다. 유통된 콘텐트도 함께 사라졌으니 삭제대상은 아닌데, 참여자 중 일부가 내려받았을 가능성은 여전하다. 시간이 흐른 뒤 이 내용물을 다시 올리면, 새로운 피해가 시작된다. 그래서 디지털 장의사들은 주기적인 모니터링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음지로 숨어버린 범죄자들
2015년 영국을 시작으로 30여 개국이 국제 공조로 미성년자 성 착취물 게재에 대해 대대적인 수사를 벌였다. 2018년 웰컴 투 코리아 주소가 한국이라는 사실이 드러났고, n번방과 박사방까지 수십 명이 붙잡혀 처벌받았다. 이후 범죄 소지가 있는 게시물들은 모두 음지로 숨었다. 자기들끼리만 유통하며 추적이 힘들어졌다. 천신만고 끝에 꼬리를 밟아 연락해도 무시한다. 이들의 수익원인 광고주도 도박이나 포르노 사이트 같은 불법 업체니 요청을 들어줄 리 만무하다.
최근에는 텔레그램이 새로운 난공불락 요새로 자리 잡았다. 서울대 딥페이크 사건의 경우 피해자와 지원단체 ‘불꽃’ 등이 무려 2년의 추적 끝에 단체방에 잠입해 가담자를 특정했다. 하지만 수시로 방을 폭파하고 옮겨 다니기 때문에 증거 채증이 쉽지 않았다. 삭제 요청을 해도 아예 대꾸가 없다. 그나마 최근 창립자 파벨 두로프가 프랑스에서 체포된 이후 약간의 태도 변화를 보이고 있다. 지난 1일 방송통신심의위에 긴급 삭제를 요청한 디지털 성범죄 영상물 25건을 모두 삭제한 사실을 전해 왔다. 범죄 악용 가능성이 있는 일부 기능도 삭제했다. 하지만 핵심인 범죄 콘텐트 게시자 특정 요구에는 묵묵부답이다.
분주하긴 하지만 부족한 정부
정부 쪽에선 여성가족부 산하 디지털성범죄피해지원센터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민간 업체들도 인정하는 상당한 노하우와 검색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피해자에게는 디성센터가 최후의 보루다. 피해자 심리 상담과 수사기관과의 협력도 이쪽이 훨씬 원활하다.
그런데도 정부의 센터를 찾았다가 민간 디지털 장의사를 다시 찾아오는 경우 많다고 한다. 신청이 너무 밀려 있는 탓이다. 최근 발표한 자료 따르면 딥페이크 피해만 매년 두배씩 느는 추세다. 하지만 인력과 장비에 한계가 있는 만큼 쉽게 진행이 안 되고 골든 타임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불법 업체들은 정부 기관의 요청에도 응답이 없다. 디성센터에 접수된 70여만 건의 삭제요청 중 20여만 건이 여전히 남아있는 이유다.
정부든 민간이든 일이 터지고 난 뒤 뒤따라가며 지우는 것에는 한계가 따른다는 점에 공감한다. 사전 예방에 특별한 묘책은 없다. 다만 제작과 유포에 한정된 처벌 대상을 단순 시청과 다운로드, 소지자로 넓혀 수요 기반을 없애야 한다고 제안한다. 수요가 없으면 공급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최현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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