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불멸의 그대에게

2024. 9. 10.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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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주리 화가

어느 애니메이션 제목이 며칠 동안 내게 꽂혔다. 어쩌면 그림 그리기를 시작한 건 불멸을 꿈꾸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 하는 문구를 딱지가 앉도록 듣고 자란 우리 세대가 문득 텔레비전에서 “아이를 낳아 나라를 구합시다” 같은 광고 메시지를 볼 때마다 세상이 너무 변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 세상 너무 변해 막막해지지만
말년 마티스 색종이 그림처럼
내 그림도 불멸의 행복감 주길

그림=황주리

인류는 후손의 대를 겨우겨우 이어나가 드디어는 불멸에 이를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이 대를 잇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각자의 소명을 다 하며 인류의 불멸에 기여할 것이다. 어느 영화 속에서 웃통을 벗은 조폭의 등허리에 불멸이라고 문신이 새겨져 있던 생각이 난다. 그때도 불멸이라는 조악한 글자가 한동안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다. 언젠가 밀란 쿤데라의 소설 ‘불멸’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적도 있다. 어제는 그 불멸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며 이화여대 캠퍼스가 마주 보이는 카페 3층에 앉아 한동안 멍때리고 있었다. 가을이 오고 있었고, 스무 살 시절의 내가 대강당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을 뾰족구두를 신고 허겁지겁 뛰어 올라가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9월 학기의 시작, 유독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졌던 나는 늘 수업 시간에 늦거나 아예 출석하지 않을 때도 잦았다. 채플 시간에 출석 날짜가 모자라 논문을 쓰고 졸업했고, 그 제목은
「니체의 ‘신은 죽었다’에 관하여」

였다. 뜻밖에도 나는 무척 후한 점수를 받았다.

페이스북을 들여다보다가 누군가 올린 댓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시절 같은 과목을 들었던 누군가의 댓글이었다. 수업 시간에 출석을 부르는데 내 이름이 들릴 때마다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학기가 끝날 때까지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시간에 “미술대학 황주리” 하고 출석을 부르는데 그날도 내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한다. 그리고 언젠가 잡지에서 발견하고 페이스북에서 만났다는 댓글이었다. 아무튼 우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이이고, 그녀는 인문대학 출신일 것 같다. 댓글 중 “미술대학 황주리” 하는 부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없는 곳에서 들려오는 나의 이름을 기억하는 그녀가 너무 반가웠다. 지금도 누군가 그렇게 불러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사십 년도 더 지난 가을 그렇게 많게만 느껴지던 계단을 바라보고 있으니 문득 그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단짝 친구와 수업을 땡땡이치고 음악감상실에서 책을 읽다가 명동 성당의 모르는 사람의 결혼식에 참석하곤 했다. 우리들의 짧은 일탈이었다. 우리가 삶의 증인으로 참여했던 그들의 결혼은 행복했을까? 일찌감치 나는 모든 게 허무했다. 초등학생이 허무하면 어쩔 것인가? 내 어린 날의 허무는 자연스러운 인생의 태도로 자리 잡았다. 누가 뭐가 되고 싶냐고 물으면 빨리 늙어서 학교 안 가는 게 꿈이라고 답했다. 길을 건널 때, 거리에서 앵벌이를 하는 장애인을 볼 때, 주인이 버린 개를 볼 때, 매일 아침 학교에서 영 소통이 되지 않는 짝의 옆자리를 향해 걸어갈 때,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속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볼 때만 경험하는 증세는 아니다. 모든 평상심에서 벗어날 때의 불안감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우리는 매일 불안을 경험한다. 이럴 때는 어른이 된 내 안의 어린이를 잘 대해줘야 한다. 무엇이 그 어린이를 불안하게 하는지 내 안의 어린이에게 물어보고 그에게 필요한 것들을 선물해야 한다. 휴식이든 맛있는 음식이든 같이 있어 기분 좋은 사람이든. 나는 요즘 보기만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 생겼다. 벌써 얼굴 본 지 3년째 되어가는 집안일을 도와주는 동생이다. 중국에서 태어난 독립운동 후손으로 한국에 와 갖은 고생 다 하면서 자식 셋을 대학 졸업 시킨 그녀는 늘 콧노래를 부르며 일을 한다. 형편이 어렵지 않은데도 살아있으므로 일한다. 나는 울적할 때마다 그녀가 콧노래를 부르며 집안일을 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 밝음이 내게로 온다. 아주 오래전 뉴욕의 미술관에서 맨 처음으로 마티스의 색종이 그림을 보았을 때 나는 그 밝음의 불멸을 보았다. 건강 이상으로 붓으로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된 말년의 마티스는 붓이 아닌 가위로 색종이 그림을 만들기 시작한다. 나는 희망한다. 언젠가 내가 그린 해바라기 그림도 내가 마티스의 색종이 그림을 보았을 때처럼 마음 어두운 사람들에게 불멸 같은 행복감을 선물하기를. 문득 이런 구절이 떠오른다. “나는 내 그림이 봄날의 밝은 즐거움을 담고 있었으면 한다.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무도 모르게 말이다.” (앙리 마티스)

황주리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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