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안마다 강공…이복현 금감원장의 힘
“끼리끼리 나눠 먹기식 문화를 발본색원할 의지가 있는지 의심이 든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손태승 전 회장의 부당대출 의혹이 불거진 우리금융그룹 경영진을 두고 한 말이다. 그의 발언 수위가 한층 높아지자 금융가에서는 이 원장이 각종 현안에 대해 강경한 입장으로 방향을 잡았다는 말이 나온다.
이 원장은 최근 서울 여의도 KB국민은행 신관에서 ‘가계부채 실수요자 및 전문가 현장 간담회’를 마치고 기자들과 만나 “말도 안 되는 회장 관련 대출이 일어나게 한 것은 과거 일이지만 현재 경영진도 개선 의지가 없는 것 같다”며 “법률적 제재든 비법률적 제재든 최근의 매니지먼트(경영진) 책임이 있지 않냐”고 꼬집었다. 이에 앞선 지난 8월 25일 한 방송사 대담에서도 “해당 사건이 (금감원에) 제때 보고되지 않은 건 명확하다”며 “이에 관해 누군가는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임종룡 우리금융그룹 회장이나 조병규 우리은행장을 명확히 지목한 얘기다.
우리금융지주의 동양·ABL생명 인수합병 사실을 금감원에 알리지 않은 데 대한 불편한 심기도 내비쳤다. 그는 “생명보험사 인수를 몰랐다. 증권사 인수 과정도 결국은 포트폴리오 확장에 리스크가 있는 게 있다. 생보사 인수 같은 경우는 훨씬 더 큰 딜인데, 저희도 ‘생보사 인수를 검토 중이다’ 내지는 ‘어떻게 된다’를 알았지만, 그날 그런 내용으로 계약이 치러진다는 것을 신문 보고 알았다”고 했다. 역시 생보사 인수 관련 리스크를 꼼꼼하게 챙기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임종룡·조병규 겨냥 강경 발언 일색
“법률적이든 비법률적이든 책임져야”
우리은행 사태를 계기로 이 원장은 그가 주도해 만든 ‘금융책무구조’ 구축에도 더욱 속도를 낼 듯 보인다. 금융업계 중대재해처벌법으로 불리는 책무구조는 각 금융사가 자체적으로 임원의 구체적 책무를 지정한 문서다. 내부통제 책임 영역을 사전에 정해두는 규준이다. 이 원장은 횡령, 배임 등 금융사고가 발생해도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다는 문제 제기를 토대로 금융책무제도를 밀어붙였다. 7월 3일 시행된 이 제도는 6개월 유예 기간을 부여했다. 금융지주사와 은행은 내년 1월 2일까지, 증권·보험사는 자산 규모 등에 따라 늦어도 2026년 7월 2일까지 금융당국에 책무구조도를 제출해야 한다.
이 원장이 밀어붙이자 금융사에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새로운 법이다 보니 어느 업무까지 얼마나 세분화해야 할지, 또 그 책임을 어디까지 물어야 할지 명확한 기준이 없어서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이 법은 최고경영자까지도 처벌할 수 있는 사항이라 금융사가 가볍게 보기 어렵다. 일부 대형 증권사는 수백억원까지 예산을 편성해서 책무구조 체계 마련에 공을 들인다. 이 원장의 강력한 드라이브에 새로운 법규 시장이 형성된 셈”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 원장이 ‘그립’을 세게 쥐고 대응에 나선 현안은 이뿐 아니다. 이 원장은 두산밥캣과 두산로보틱스 합병에 관해 전례 없을 정도로 끈질긴 견제에 나서 결국 좌절시켰다. 금감원은 합병 계획에 대해 합병 비율의 적정성을 문제 삼고 나섰다. 밥캣 주식 가치는 10% 할증하고 로보틱스는 10% 할인해 사실상 논란의 핵심이 되는 합병 비율을 소액주주에 유리한 방향으로 바꾸라는 것. 그는 “부족함이 있다면 횟수 제한 없이 정정 요구를 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그러자 두산은 결국 원안을 버리고 플랜B로 전환했다. 문제가 됐던 밥캣과 로보틱스 간 주식 교환은 하지 않고 에너빌리티가 가진 밥캣의 주식만 두산로보틱스에 이전하는 절충안이다. 이 원장은 셀트리온과 셀트리온제약 합병에도 목소리를 내 계열사 간 합병 계획을 철회시켰다.
이 원장, 금융책무구조 강력 드라이브
두산 합병 무산시켜…오락가락 발언도
금융권에서는 이 원장의 우리은행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검사 vs 모피아(기획재정부 출신)의 갈등’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윤석열정부 출범 이후 검찰에서 나와 금감원장이 된 이 원장이 금융권 관가 출신으로 민간 금융사에 둥지를 튼 임 회장을 저격하는 모양새라는 것. 이 원장은 사법연수원 32기로 윤 대통령이 검사일 때부터 측근으로 분류됐다. 임 회장은 24회 행정고시를 통해 관료가 된 후 2015~2017년 금융위원장을 지내는 등 핵심 요직을 거친 전형적인 금융 관료다. 한 정치권 인사는 “윤 대통령 최측근 인사로 분류됐던 이 원장이 용산 대통령실 정책과 엇나가는 부분이 있어 다소 위축됐다 우리은행 사태를 계기로 잘못된 관행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잘못된 부분을 수사하는 검사 출신 금감원장의 존재감을 높이고, 현 정부에서 강력한 관료 인맥을 형성한 모피아를 겨냥한다는 시선이다.
금융당국과 우리금융 주변에서도 이런저런 음모론도 쏟아진다. ‘임 회장이 외부 청탁을 거절해 미운털이 박혔다’는 게 골자다. 임 회장은 우리금융이 망가진 게 외부 청탁 때문이라고 판단해 원칙을 중시하고 청탁을 멀리하다 보니 타깃이 됐다는 것. 임 회장이 이런 문제로 고민을 하고 주변 지인에게 토로했다는 말도 들린다.
한편, 이 원장 발언이 잦아지고 수위가 높아지는 것을 곱지 않게 보는 시각도 있다. 지나치게 시장에 개입하다 보니 이 원장 발언에 따라 시장이 왜곡되는 현상이 발생한다는 비판이다.
은행 대출과 금리 정책이 그 사례다. 이 원장은 지난 8월 25일 “대출 금리 상승은 당국이 바란 게 아니다. (은행에 대한) 개입을 더 세게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이후 은행들은 경쟁적으로 대출 한도 축소와 유주택자 대출 제한 같은 조치를 쏟아냈다. 그런데 불과 10일 만인 9월 4일 “정상적인 주택 거래에서 발생하는 대출 실수요까지 제약받아선 안 된다”고 규제 완화 메시지로 전환했다. 금융당국 실세인 이 원장의 말 한마디에 은행들이 가계대출 정책을 바꾸는 상황이 연출됐다. 이 때문에 금융권 관계자나 대출 수요자들은 “이 원장의 섣부른 발언이 부동산 시장의 최대 위험 요인이 됐다”고 볼멘소리를 낸다.
오락가락하는 이 원장 행보는 이번만이 아니다. 이 원장은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에 걸쳐 은행권을 향해 “고금리 지속으로 서민의 이자 부담이 가중된다”며 이른바 ‘상생 금융’을 주문했다. 은행들은 일제히 대출 금리를 인하했다. 그러다가 지난 7월 임원회의에서 “성급한 금리 인하 기대와 국지적 주택 가격 반등에 편승한 대출 확대가 가계부채 문제를 다시 악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했다. 그의 발언 이후 은행권은 경쟁적으로 대출 금리를 인상했다. 주요 은행들이 한 달 사이 20번에 가까운 금리 인상에 나섰다. 그러자 지난 8월 25일 금리 인상이 아닌 다른 가계부채 관리 방안을 주문했고, 이제 다시 ‘속도 조절’로 말을 바꿨다.
[명순영 기자 myoung.soonyoung@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76호 (2024.09.11~2024.09.26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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