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악기 얼마니?" 묻자 돌아온 소년의 맹랑한 대답
[안준철 기자]
▲ 시인 김영언의 인도 기행 <노 프러블럼 인디아> 표지 |
ⓒ 삶창 |
인도에 갈 일이 없는 내가 '시인 김영언의 인도 기행' <노 프라블럼 인디아>(삶창, 2024년)를 재미있게 읽었다. 인도에 갈 일이 없는 것은 순전히 아내 때문이다. 아내에게 인도는 한 마디로 "더러운" 나라로 인식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도 인도 여행에 대한 "환상이 환상이었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 책은 인도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저자는 주저 말고 길을 나서라고 권한다. 시인은 인도 여행을 하면서 겪은 진귀하고 특별한 경험들을 독자들과 공유함으로써 환상이 아닌 알짜배기 진짜 인도 여행이 되도록 안내한다.
책으로만 읽어도 마치 인도를 샅샅이 경험한 것처럼 생생한 글맛이 난다. 한참 책(문장)에 빠져 있다 보면 여행기라기보다는 여행소설을 읽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시인의 인도 기행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 생애 있어서 참으로 역사적이라고 할 첫 인도 여행(차라리 탐험이 고행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은 에어 인디아(인도항공) 여객기의 누렇게 색 바랜 의자에 기대 앉아 무려 열 시간에 육박하도록 갖가지 상념으로 지루하게 뒤척인 끝에 도착한 뭄바이의 어두운 거리에서 시작되었다." (p.12)
저렴한 항공료 때문에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있는 '에어 인디아'는 낡은 기체를 헐값에 사들여 운행하기 때문에 2년에 한 대는 꼭 추락한다는 소문이다. 그러나 작년에 한 대가 이미 추락했으므로 올해는 안심해도 된다는 얘기들을 배낭여행자들이 나누고 있더란다.
▲ 저자가 인도를 여행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노 프러블럼No problem"이란다.(자료사진) |
ⓒ hbs_photography on Unsplash |
"도대체 이런 의식의 기저가 낙천성인지 무개념인지도 의아스럽기 그지 없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말 자체가 '문제'라고 여겨지지만, 결국에는 말 그대로 '문제가 없다'는 생각에 동의하게 되는 과정이 인도 여행이다. 결론적으로 그렇게 되었다면 인도 여행에 성공한 것이다." ('책을 내며' 중에서)
책을 읽다보면 이렇듯 반전의 장면이나 순간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세상을 읽는 저자의 역발상의 인문학적 사유가 빛나는 대목이다. 이 책을 읽는 묘미이자 유익이라 하겠다.
상처도 아름다운 엘레판트 섬
'게이트웨이 오브 인디아' 바로 앞에서 유람선을 타면 엘레판트 섬까지 한 시간 남짓 걸린다. 그 섬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유명한 석굴사원이 있다. 저자는 이곳의 조각상들이 심하게 훼손이 된 것을 보고 의아해 한다. 그런데 그 이유가 기가 막히다. 1534년 이곳에 상륙한 포르투칼 군인들이 사격 훈련 표적으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들의 무지몽매함에 아연실색하며 씁쓸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이곳 파괴된 조각상들에 대한 유적으로서의 의미 부여를 다음과 같이 한다.
"지금 유럽의 강대국들이 자랑하는 내로라하는 박물관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약탈문화재들은 가진 자들의 횡포가 얼마나 일방적이고 후안무치한 것인가를 증명해주는 것이란 점에서도 아주 귀중한 유물이 아니던가." (p30)
바라나시는 "인도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이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의 하나"라는 찬사를 받는 곳이다. 하지만 막상 가서 보니 "거리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복잡"했고 "행인과 자전거와 오토바이와 소떼들과 싸이클릭샤와 오토릭샤와 자동차들이 한데 뒤엉켜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저자는 걸어가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 내려달라고 요구했지만 릭샤월라는 습관처럼 "노 프로블럼 No Problem"을 외칠 뿐이다.
그때, 한껏 짜증스러움에 일그러진 저자의 시야에 특이한 광경이 잡힌다. 저만치 뒤처진 자동차 지붕 위에 비단과 꽃에 쌓인 무엇인가가 줄로 매어 실려 있었는데, 놀랍게도 시신이었다. 지금 강가로 화장을 하러 가는 중이라고 릭샤 운전사는 말해준다.
"죽은 자와 함께 가는 길이라니! 지금 등 뒤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망자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 그는 그림자였다. 산 자들 누구나가 보이지 않게 등 뒤에 이끌고 다니는 숙명의 그림자였다. 어느 결엔가 마음 속에 자욱했던 조바심과 짜증이 소멸되어 버렸다." (p.144)
여행지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상인이나 릭샤 운전사와 같은 현지인들에 대한 생생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이 책의 미덕 중 하나다. 하지만 정보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에 대한 '나'의 태도다.
저자는 타지마할의 장엄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보러 가기 위해 오토릭샤를 빌려 타고 따가운 햇살 속으로 숙소를 나선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이 공교롭게도 타지마할이 문을 닫는 금요일이었다. 릭샤 운전사는 그걸 뻔히 알고 있었을 텐데도 얄팍한 장사 속으로 이방인을 골탕 먹인 것이다.
저자가 이에 항의하자 재미있다는 듯 말없이 싱글벙글 웃기만 한다. 이런 일을 겪은 저자의 다음 글이 인상적이다.
"낯선 길에서 무작정 남을 믿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남을 불신하는 것도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그 운명을 가를 순간의 판단은 순전히 경험과 직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여행자로서의 초보와 고수는 바로 그것에 의해 구분되는 것일 터이다." (p.174)
책 뒤표지에는 인도 정통 악기를 연주하는 소년을 만난 경험을 소개하는 글의 일부가 적혀 있다. 나도 매우 인상적으로 읽었던 대목이다.
저자는 소년에게 악기의 가격이 얼마인지 묻는다. 그러자 소년은 이 악기를 사고 싶으냐고 되묻는다. 상황이 애매했지만 저자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엉겹결에 그렇다고 한다. 그러자 다시 돌아온 대답이란다.
"그럼 내 삶을 사야 해요. 내 평생을요."
이 대답이 "참으로 황당하면서도 절묘"했다고 시인 저자는 술회한다. "그러니까 그 악기 가격은 그가 평생 연주하면서 벌어들일 수입이 되는 셈"이다. 참으로 간단하고도 명료한 그의 셈법에 탄복하면서, "너무 쉽게 자신의 생존권을 매수하려고 하는 이 철없는 이방인에게 정중하고도 단호하게 거부의 뜻을 밝힌 것"이라고 저자는 생각한다. 글은 이렇게 갈무리된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세상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냉혹한 생존 법칙을 익혀가고 있는 그를 단지 연민과 동정 어린 시선으로만 바라보던 나는 무방비 상태에서 일격을 당한 것처럼 민망한 표정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영악한 그를, 아니 인도라는 대륙을 너무 만만하게 본 대가를 톡톡히 치른 셈이다." (p.315)
책을 읽으면서 접어 놓은 대목이 많다. 시인의 문장이 빼어 나서다. 저자가 직접 찍은 듯한 사진들도 명품이다. 시각이나 관점이 참 좋다. 고품격 문장도 사진도 직접 확인해보시기 바란다.
한편 이 책의 저자인 김영언 시인은 <황해문학>을 통해 등단 했고, 현재 인천작가회의 지회장으로 활동하며, 시와 여행기 등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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